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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의 수도 캔버라에는 조금 특별한 보물창고가 있습니다. 화려한 왕관이나 보석 대신 조개껍데기 목걸이, 나무껍질 카누, 금광 시대의 장신구, 심지어 전설적인 경주마의 심장까지 등장합니다. 호주 국립박물관은 이처럼 뜻밖의 물건들로 한 대륙의 역사를 들려줍니다.
이곳에서 보물의 가치는 재료의 가격보다 그 안에 담긴 이야기에 있습니다. 수만 년 동안 이어진 원주민의 문화에서 유럽인의 도착과 식민지 시대, 현대 호주의 형성까지. 오래된 물건들이 들려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1. 수만 년의 기억, 원주민이 남긴 아름다운 유산
호주의 역사는 유럽 탐험가들이 도착하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원주민들은 수만 년에 걸쳐 이 대륙의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며 서로 다른 언어와 풍습, 예술과 기술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들에게 땅과 바다, 강과 숲은 생활의 터전이자 조상들의 이야기와 지식이 이어지는 공간이었습니다.
물론 호주 원주민의 문화를 하나로 묶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태즈메이니아의 해안과 북부 아른험랜드, 토레스 해협의 섬들은 저마다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유물들을 통해 그 다채로운 세계를 만나보겠습니다. 작은 조개껍데기 하나에도 예상보다 훨씬 긴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조개껍데기가 보석이 되고, 나무껍질이 배가 되다

먼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조개 목걸이(Tasmanian Aboriginal shell necklaces)를 살펴보겠습니다. 크기와 색이 다른 작은 조개껍데기들이 가지런히 이어져 있습니다. 금이나 은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조개 특유의 은은한 광택과 반복되는 형태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이 목걸이의 진짜 매력은 만드는 과정에 있습니다. 태즈메이니아의 팔라와(Palawa) 여성들은 해안에서 적합한 조개를 채집하고, 작은 구멍을 뚫어 실에 꿰는 기술을 세대를 거쳐 전해왔습니다. 특히 무지갯빛 광택을 지닌 마이리너(maireener) 조개는 전통 목걸이 제작에 사용되는 대표적인 재료입니다.
조개의 크기와 색을 맞추고 하나씩 연결하는 작업에는 상당한 정성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보석상에서 진주 목걸이를 고르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더욱 뜻깊은 것은 이 제작 전통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목걸이는 아름다운 장신구이면서 여성들이 지켜온 문화적 지식과 정체성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제 태즈메이니아 나무껍질 카누(Tasmanian bark canoe)로 시선을 옮겨보겠습니다. 길고 좁은 선체의 양쪽 끝이 위로 솟아 있는 모습이 독특합니다. 나무를 파내는 대신 여러 겹의 나무껍질을 묶어 형태를 만든다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나무껍질로 배를 만든다고 하면 간단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재료의 성질과 물의 움직임을 정확히 이해해야 가능한 기술입니다. 어떤 껍질이 물에 잘 견디는지, 어떻게 묶어야 형태를 유지하는지 오랜 경험이 필요했습니다.
사진 속 카누는 전통 기술을 계승한 원주민 장인 렉스 그리노(Rex Greeno)와 가족의 작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개 목걸이가 섬세한 미적 감각을 보여준다면, 이 카누에는 자연을 이해하고 활용한 기술적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두 작품 모두 오래된 전통이 오늘날에도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가면과 그림에 담긴 세계

호주 북쪽, 본토와 파푸아뉴기니 사이에는 토레스 해협이 있습니다. 이곳의 섬 주민들은 바다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인 언어와 예술, 의례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그 세계를 보여주는 인상적인 작품이 알릭 티포티(Alick Tipoti)의 《수구 마와》(Sugu Mawa, 2011)입니다.
사진을 보면 강렬한 눈매와 붉은 깃털, 흰색 장식이 먼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아래쪽으로 뻗은 문어의 다리는 작품에 생동감을 더합니다. 문어라는 바다 생물의 특징을 가면의 형태로 풀어낸 예술가의 상상력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단순히 기이하고 화려한 가면으로만 감상하기에는 아쉽습니다. 토레스 해협의 가면 전통은 공연과 의례, 공동체의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수구 마와》 역시 이러한 전통을 현대적인 예술로 이어간 작품입니다. 오래된 문화가 반드시 오래된 모습으로만 남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모닝턴섬 머리장식(Mornington Island headdress)도 눈길을 끕니다. 원뿔형 몸체에는 흰색과 적갈색 문양이 그려져 있고, 꼭대기에는 에뮤 깃털이 펼쳐져 있습니다. 앞면과 뒷면의 장식이 달라 어느 방향에서 보느냐에 따라 인상이 바뀝니다.
1955년경 딕 러프시(Dick Roughsey)가 제작한 것으로 소개되는 이 머리장식은 퀸즐랜드 북부 모닝턴섬의 문화와 연결됩니다. 진열장 안에서는 하나의 조형물처럼 보이지만, 원래 머리장식은 사람이 착용하고 움직일 때 또 다른 생명력을 얻는 물건입니다. 춤과 노래, 몸의 움직임까지 떠올리면 장식의 의미가 한층 풍부해집니다.

이번에는 야우키야우크 조각(Yawkyawk sculptures)을 살펴보겠습니다. 식물 섬유를 엮어 만든 길쭉한 몸체에 사람을 닮은 얼굴과 물고기 꼬리 형태가 나타납니다. 얼핏 보면 서양 신화의 인어가 떠오르지만, 야우키야우크는 전혀 다른 문화적 세계에 속한 존재입니다.
아른험랜드 일부 원주민 공동체의 전승에서 야우키야우크는 물웅덩이와 특정한 장소, 조상들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영적 존재입니다. 조각의 섬세한 짜임과 반복되는 문양은 전통적인 섬유 공예 기술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원주민 예술에서는 아름다운 형상과 공동체의 지식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 관계는 회화에서도 이어집니다. 파푸냐 회화 컬렉션(Papunya collection)은 호주 원주민 현대미술의 중요한 흐름을 보여줍니다. 1970년대 초 중앙호주의 파푸냐에서 예술가들은 아크릴 물감과 판자 같은 새로운 재료를 이용해 자신들의 이야기를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속 점과 선, 동심원은 언뜻 추상적인 장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는 장소와 이동 경로, 조상들의 이야기와 연결되기도 합니다. 다만 모든 문양에 하나의 고정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며, 공동체의 관습에 따라 공개되지 않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림을 감상할 때 이러한 문화적 맥락을 존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인 우타 우타 장갈라(Uta Uta Tjangala)의 《유마리》(Yumari, 1981)를 보겠습니다. 붉은색과 황토색 바탕 위로 검은색과 흰색 동심원, 수많은 점과 선이 펼쳐집니다. 가까이에서는 정교한 무늬가 눈에 들어오지만, 조금 떨어져 보면 화면 전체가 복잡한 리듬을 이루는 듯합니다.
이 작품은 작가가 관계를 맺어온 장소와 조상들의 이야기에서 의미를 얻습니다. 우리가 지도에서 길과 지명을 읽듯, 이 그림에도 특정한 문화적 지식 안에서 이해되는 시각 언어가 담겨 있습니다. 단순히 아름다운 추상화라고만 부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마르투밀리 응우라》(Martumili Ngurra, 2009)는 더욱 넓은 화면으로 우리를 맞이합니다. 붉은색과 황토색, 노란색의 점과 곡선이 겹쳐지며 서호주 사막의 땅과 물길을 연상시킵니다. 마르투 원주민 여성 예술가들이 함께 제작한 작품으로, 개인의 표현을 넘어 공동체가 공유하는 장소와 기억을 담고 있습니다.
응우라(Ngurra)는 마르투 사람들에게 집과 고향, 자신이 속한 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입니다. 이 그림을 바라보면 땅은 단순히 소유하거나 경계를 나누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과 조상, 기억이 이어지는 장소로 다가옵니다.
이제 전시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지금까지의 작품들이 원주민 공동체가 이어온 문화와 지식을 보여주었다면, 다음 유물들은 유럽인의 도착 이후 변화한 권력관계를 드러냅니다.

원주민 흉패(Aboriginal breastplates)는 식민지 시대에 일부 원주민에게 수여되었던 금속 표식입니다. 흔히 킹 플레이트(King plate)라고도 불렸습니다. 사진 속 빌리 히피의 흉패(Billy Hippie breastplate)에는 말을 탄 인물과 가축의 모습, 그리고 빌리 히피를 왕으로 지칭하는 영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언뜻 보면 명예로운 훈장처럼 보이지만, 그 배경은 복잡합니다. 식민지 사회는 일부 원주민에게 왕이나 여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원주민 공동체의 지도 체계와 권위는 유럽식 왕정 제도와 같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흉패는 원주민의 전통적인 지위보다 식민지 사회가 그들을 바라보던 시선을 보여주는 유물이기도 합니다.

빅토리아 탐험대 흉패(Victorian Expedition breastplate, 1862)에는 조금 다른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이 황동 흉패는 버크와 윌스 탐험대의 생존자들을 도왔던 원주민들의 행동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표면에 새겨진 글귀는 당시 유럽인들이 그 도움을 어떻게 기록했는지 보여줍니다.
처음 살펴본 조개 목걸이와 두 흉패는 모두 몸에 착용하는 장식품입니다. 그러나 하나는 공동체 내부에서 이어져 온 아름다움과 기술을, 다른 것들은 식민지 시대의 만남과 권력관계를 보여줍니다. 겉모습만으로는 알 수 없는 역사의 차이입니다.
호주 국립박물관의 원주민 유물은 사라진 과거를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예술과 제작 기술, 땅에 대한 기억, 식민지 시대의 복잡한 관계를 함께 들려줍니다. 작은 조개 목걸이에서 시작한 관람이 어느새 한 대륙의 문화와 정체성을 생각하는 자리로 이어졌습니다.
2. 탐험가의 닻과 죄수의 동전,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의 이야기
원주민의 유물들이 오랜 세월 이어진 삶과 문화를 보여주었다면, 이제 전시실에는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의 흔적이 등장합니다. 항해와 측량에 사용한 도구, 바닷속에서 건져 올린 닻,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은 동전까지. 이 물건들은 호주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유럽인들에게 호주는 탐험과 새로운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은 이미 수많은 원주민 공동체가 살아가던 터전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역사를 발견과 개척이라는 말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출발이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질서가 흔들리는 변화였기 때문입니다.
바다를 건너온 탐험가들의 흔적

먼저 제임스 쿡의 항해 관련 유물(Captain Cook collection)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진에는 작은 은제 보관함과 확대경, 측량 도구의 틀로 소개된 물건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거대한 범선이나 화려한 항해 지도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탐험이 세밀한 관찰과 기록에 의존했던 활동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날에는 위성항법장치가 배의 위치를 알려주지만, 18세기 항해사들은 태양과 별, 수평선과 시간을 이용해 위치를 계산해야 했습니다. 망망대해에서 작은 오차가 쌓이면 위험한 암초에 접근하거나 예정된 항로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쿡은 1768년 엔데버호를 이끌고 태평양으로 떠났습니다.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는 타히티에서 금성이 태양 앞을 지나가는 현상을 관측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항해는 이후 뉴질랜드와 호주 동해안의 조사로 이어졌고, 1770년 쿡은 호주 동해안을 따라 항해하며 해안선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지도에 새로운 해안선이 그려졌다고 해서 그 땅의 역사가 비로소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원주민들은 이미 오랜 세월 그곳의 지형과 계절, 물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같은 해안을 바라보면서도 항해사와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은 서로 다른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은 인베스티게이터호의 보조 닻(Investigator's stream anchor)입니다. 길게 뻗은 철제 자루와 양쪽으로 벌어진 닻팔에는 오랜 세월 바닷속에 잠겨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거대한 닻은 왜 바다에 버려졌을까요?
매슈 플린더스(Matthew Flinders)는 1801년 인베스티게이터호를 이끌고 호주 해안 조사에 나섰습니다. 1803년 5월, 배가 남부 해안의 르셰르슈 군도에 머물던 중 거친 날씨를 만났고, 선원들은 배를 지키기 위해 닻 두 개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항해에서 닻은 배를 붙잡아주는 장비지만, 때로는 배를 구하기 위해 그 닻을 놓아야 했던 것입니다.
바닷속에 남겨진 닻은 약 170년이 흐른 1973년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길이 약 3m에 이르는 이 철제 유물은 플린더스가 호주 해안을 조사했던 항해의 생생한 흔적입니다. 지도에 남은 선보다 거칠게 부식된 쇳덩어리 하나가 당시의 위험을 더 실감 나게 전해주기도 합니다.

바다를 건너는 일이 위험했다면, 호주 대륙의 내륙을 횡단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버크와 윌스 탐험대(Burke and Wills expedition)의 이야기는 그 야심과 비극을 함께 보여줍니다. 사진 속 두 인물은 탐험대를 이끌었던 로버트 오하라 버크와 윌리엄 존 윌스입니다.

1860년 탐험대는 멜버른 시민들의 환송을 받으며 북쪽으로 출발했습니다. 화가 S. T. 길(S. T. Gill)의 그림에는 말과 낙타, 각종 장비를 갖춘 탐험대가 등장합니다. 출발 장면만 보면 새로운 세계를 향한 당당한 행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앞에는 예상보다 훨씬 가혹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탐험대는 많은 식량과 장비를 준비했지만, 내륙의 극심한 더위와 건조한 환경을 극복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사진에는 윌스의 금제 회중시계와 버크의 가죽 물통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전시 장면이 담겨 있습니다. 시간을 확인하던 시계와 물을 담던 물통은 탐험가들의 일상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떠올리게 합니다.
버크와 윌스를 포함한 일부 대원들은 북쪽까지 나아갔지만, 귀환길에는 식량 부족과 피로가 겹쳤습니다. 많은 장비를 준비하는 것과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탐험 경로를 표시한 지도를 보면 멜버른에서 출발한 여정이 대륙의 북쪽까지 길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지도 위에 그어진 선만으로는 그들이 겪었던 갈증과 피로, 수많은 판단의 순간을 알기 어렵습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탐험대가 지나간 땅에는 이미 오랫동안 살아온 원주민 공동체가 있었고, 그들은 계절에 따라 물과 식량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야드루완다(Yandruwandha) 사람들은 탐험대 생존자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버크와 윌스는 결국 1861년 귀환 도중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탐험은 유럽인들의 도전 정신만큼이나 원주민의 환경 지식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지도를 완성하는 일과 그 땅을 제대로 이해하는 일은 반드시 같지 않았습니다.
작은 동전에 새겨진 그리움

거대한 닻과 탐험 지도를 지나면 이제 손바닥에 들어오는 작은 물건을 만나게 됩니다. 죄수 기념 동전(Convict love tokens)입니다. 앞서 살펴본 유물들이 탐험의 도전과 위험을 이야기했다면, 이 동전에는 바다를 건너야 했던 사람들의 그리움이 담겨 있습니다.
사진 속 동전은 1797년 영국에서 발행된 카트휠 페니(Cartwheel penny)입니다. 한쪽에는 조지 3세 국왕의 초상이, 다른 쪽에는 삼지창과 방패를 든 브리타니아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사진은 사랑의 문구가 새겨진 완성품이 아니라, 죄수 기념 동전에 사용될 수 있었던 구리 동전의 형태를 보여주는 예시입니다.
18세기 말부터 영국은 죄수들을 호주로 이송했습니다. 당시에는 비교적 가벼운 재산 범죄에도 무거운 형벌이 내려질 수 있었습니다. 먼 식민지로 떠난다는 것은 가족과 연인을 오랫동안, 때로는 영원히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였습니다.
일부 죄수들은 구리 동전의 표면을 매끄럽게 다듬고 그 위에 이름과 날짜, 짧은 문장이나 그림을 새겼습니다. 하트와 배,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동전은 더 이상 돈이 아니었습니다. 이별을 앞둔 사람이 남길 수 있었던 작은 편지와도 같았습니다.
넉넉한 형편이었다면 반지나 목걸이를 선물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동전 한 닢은 마음을 남길 수 있는 현실적인 재료였습니다. 단단한 금속 표면에 글자를 새기는 수고마저 그리움의 일부였을 것입니다.
역사책에는 몇 년에 몇 명의 죄수가 호주로 이송되었다는 숫자가 남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동전에는 그 숫자 속에 있었던 한 사람의 목소리가 담겨 있습니다. 거대한 식민지의 역사도 결국은 누군가의 이별과 기다림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3. 금광의 열풍, 호주의 금과 은이 빚어낸 보물들
19세기 중반, 호주의 땅속에서 발견된 금이 사람들의 운명을 뒤흔들었습니다. 평범한 노동자도 하루아침에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소문에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물론 금을 찾아 나선 모두가 부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행운을 얻었고, 어떤 사람은 빈손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골드러시가 남긴 것은 금덩어리만이 아니었습니다. 새롭게 형성된 부와 소비문화는 금세공과 은세공의 발전으로 이어졌습니다. 캥거루와 에뮤, 호주의 꽃과 새, 때로는 광부의 곡괭이까지 장신구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금을 캐던 시대에 사람들이 무엇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 화려한 공예품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금광에서 시작된 부와 장신구의 시대

1851년 뉴사우스웨일스와 빅토리아에서 본격적인 금 발견 소식이 전해지면서 호주는 거대한 골드러시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밸러랫(Ballarat)과 벤디고(Bendigo)는 금을 찾아온 사람들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영국과 유럽뿐 아니라 중국과 미국 등 여러 지역에서 이주민들이 몰려왔고, 금광 주변에는 상점과 숙소, 새로운 마을이 생겨났습니다.
사진 속 금덩어리는 자연이 만들어낸 불규칙한 형태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반듯한 금괴와는 사뭇 다릅니다. 광부들이 찾아 헤맸던 것은 바로 이런 자연 상태의 금이었습니다. 흙과 자갈을 파내고 씻어가며 작은 금 조각을 골라내는 일은 오랜 시간과 노동을 요구했습니다.
골드러시가 모두에게 축복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열악한 노동환경과 질병, 금광의 소유권과 채굴 허가를 둘러싼 갈등이 이어졌습니다. 금광의 확장은 원주민 공동체의 땅과 생활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눈부신 금빛 뒤에는 성공한 사람들뿐 아니라 그 변화의 대가를 치른 사람들의 역사도 남아 있습니다.

금을 발견한 사람들은 그 부를 어떻게 보여주었을까요? 한 가지 답은 밸러랫 금제 반지(Gold ring)에 있습니다. 반지 중앙의 방패 모양 장식에는 밸러랫이라는 지명과 교차된 채굴 도구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양옆을 감싸는 식물무늬까지 살펴보면 작은 반지 하나에 상당한 세공 기술이 들어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반지가 단순히 금의 무게를 과시하는 물건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금광의 이름과 도구를 장식으로 삼았다는 것은 그 지역에서 이루어진 노동과 성공을 기억하려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여행지의 이름을 새긴 기념품을 구입하듯, 당시에도 자신이 경험한 장소를 몸에 지니고 싶었던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금으로 만든 기념품이라는 점에서 가격은 상당히 달랐겠지요.

금광 시대의 장신구가 얼마나 화려해졌는지는 롤라 몬테스의 금제 브로치(Lola Montez gold brooch)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855년 유명한 무용가이자 공연자였던 롤라 몬테스에게 선물된 것으로 소개되는 작품입니다.
사진을 자세히 보면 중앙의 방패 양옆으로 캥거루와 에뮤가 배치되어 있고, 그 주변을 나뭇잎과 포도송이 같은 장식이 감싸고 있습니다. 작은 브로치라기보다 금으로 만든 축소판 기념 조형물에 가깝습니다. 여러 문양을 한꺼번에 담으면서도 전체의 균형을 유지한 세공이 인상적입니다.
이 작품은 호주 국립박물관이 소개한 자료에 등장하지만, 사진 출처에는 개인 소장품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박물관 소장품과는 구분해서 감상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당시 호주의 금세공이 어느 정도의 화려함과 상징성을 추구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같은 시대에는 곡괭이와 삽, 금을 씻어내는 도구 등을 장식으로 표현한 금광 시대 브로치(Goldfields brooch)도 제작되었습니다. 노동에 사용하던 도구를 금으로 재현했다는 발상이 재미있습니다. 땀 흘려 일하던 광부의 장비가 어느 순간 가슴에 다는 장신구로 바뀐 것입니다. 이러한 작품에서는 금광의 노동과 부에 대한 자부심이 함께 드러납니다.
호주의 자연을 금속에 새기다

이제 금세공사들이 호주의 자연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캥거루와 에뮤 장식 투각 브로치(Openwork brooch with kangaroo and emu)에는 타원형 테두리 안으로 두 동물과 나무, 식물 문양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부분은 문양 사이사이의 빈 공간입니다. 투각은 금속의 일부를 도려내 형태를 드러내는 장식 기법입니다. 금속판을 빽빽하게 채우는 대신 배경을 비워두기 때문에 동물과 식물의 윤곽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단단한 금속이 마치 섬세한 레이스처럼 보이는 이유입니다.
캥거루와 에뮤는 오늘날 호주의 국장에도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브로치가 제작되던 19세기에는 아직 현재의 호주 연방이 성립하기 전이었습니다. 이 동물들은 식민지 사회가 자신이 살고 있는 대륙의 독특한 자연을 장식과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호주의 꽃과 새를 장식한 투각 팔찌(Openwork bracelet with Australian flora and birds)는 조금 더 천천히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사진에는 일곱 개의 타원형 장식판이 작은 금고리로 연결된 모습이 보입니다. 장식판마다 서로 다른 식물과 새가 표현되어 있어 하나씩 감상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워라타와 뱅크시아 같은 호주 특유의 식물, 새와 양치식물의 형태가 정교한 금세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장식판을 이어 붙이는 방식 덕분에 팔찌는 손목의 움직임에 맞춰 자연스럽게 구부러질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과 착용 편의성을 함께 고려한 설계입니다.
이 팔찌는 19세기 호주의 금세공 업체 호가스·에릭센 앤드 컴퍼니(Hogarth, Erichsen and Co.)와 관련된 작품으로 소개됩니다. 유럽에서 발전한 금속공예 기술에 호주 고유의 동식물을 결합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당시의 장신구는 부를 보여주는 물건인 동시에 호주의 자연을 소개하는 작은 전시장이기도 했습니다.

다음 작품은 시대를 훌쩍 건너 20세기의 호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남십자성 브로치(Southern Cross brooch)입니다. 이름만 들으면 밤하늘의 남십자자리를 표현했을 것 같지만, 사진 속에는 작은 비행기가 놓여 있습니다.
1928년 찰스 킹스퍼드 스미스(Charles Kingsford Smith)와 동료들은 서던 크로스(Southern Cross)라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서 호주까지 태평양을 횡단했습니다. 여러 구간을 거친 장거리 비행이었지만, 당시 항공 기술을 생각하면 놀라운 성취였습니다.
킹스퍼드 스미스는 자신의 비행기를 본뜬 보석 브로치를 아내 메리에게 선물했습니다. 사진을 보면 날개와 동체는 물론 프로펠러와 바퀴까지 세심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다이아몬드와 푸른색 보석이 더해져 작은 비행기가 화려한 장신구로 변했습니다.
이 브로치는 골드러시 시대의 작품은 아닙니다. 그러나 금속과 보석에 당대 사람들이 자랑스럽게 여긴 대상을 담는다는 점에서는 앞서 본 장신구들과 통합니다. 19세기에는 금광과 호주의 자연이, 20세기에는 하늘을 건넌 비행기가 장식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이번에는 손목이나 가슴에 착용하는 장신구에서 벗어나 조금 더 큰 작품을 만나보겠습니다. J. 헨리 슈타이너의 은제 중앙장식(Silver centrepiece by J. Henry Steiner)입니다. 호주에서 활동한 은세공사 슈타이너는 정교한 금속공예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사진 속 작품은 은으로 만든 나무가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가지와 잎이 사방으로 뻗어 있으며 아래쪽에는 캥거루를 비롯한 동물들이 자리합니다. 은이라는 차가운 재료로 살아 있는 자연의 움직임을 표현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나뭇잎과 가지가 겹치는 부분을 살펴보면 세공사가 얼마나 세밀하게 작업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1880년 멜버른 국제박람회에 출품된 것으로 소개됩니다. 당시 국제박람회는 여러 지역이 산업과 기술, 공예 수준을 세계에 보여주는 무대였습니다. 은으로 만든 화려한 장식품은 단순한 사치품을 넘어 호주 식민지 사회의 기술과 예술적 성취를 알리는 역할도 했습니다.
중앙장식은 식탁이나 실내의 중심에 놓아 장식 효과를 높이는 물건입니다. 음식보다 장식품이 먼저 눈에 들어오는 식탁을 상상해 보아도 좋겠습니다. 부유한 가정의 취향과 지위를 드러내는 데 이런 작품이 얼마나 효과적이었을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작품은 금도 은도 아닌 도자기입니다. 윌리엄 무어크로프트의 워라타 꽃병(Waratah vase by William Moorcroft)은 짙은 유약 위로 붉은 꽃이 강렬하게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워라타(Waratah)는 호주 동부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입니다. 작은 꽃들이 모여 커다란 꽃머리를 이루기 때문에 멀리서도 존재감이 뚜렷합니다. 꽃병에는 그 독특한 형태와 붉은 색채가 대담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제작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꽃병은 호주의 금광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1939년 영국 스태퍼드셔에서 제작되었습니다. 영국 도예가가 호주의 꽃을 장식 문양으로 선택했다는 점에서, 호주 자연의 이미지가 국경을 넘어 공예의 소재로 확장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금광의 반지에서 출발해 캥거루 브로치, 은제 나무, 붉은 워라타 꽃병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재료도 시대도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와 장소에서 특별하다고 여긴 것을 아름다운 물건으로 남겼습니다. 금속과 도자기 표면에는 부의 역사뿐 아니라 호주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도 담겨 있습니다.
4. 자동차와 경주마의 심장, 호주 국민이 사랑한 특별한 보물
화려한 장신구를 지나면 조금 뜻밖의 보물들이 기다립니다. 유리 용기에 보존된 경주마의 심장, 오래된 자동차, 세월의 흔적이 남은 크리켓 모자입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작품에 비하면 소박하지만, 호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는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는 물건들입니다.
전설적인 경주마가 남긴 진짜 심장

파 랩의 심장(Phar Lap's heart)은 호주 국립박물관에서 가장 뜻밖의 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유리 용기 안에 보존된 것은 모형이 아니라 실제 경주마의 심장입니다. 경주마의 신체 일부가 어떻게 국가적인 보물이 되었을까요?
파 랩은 1926년 뉴질랜드에서 태어났습니다. 처음부터 뛰어난 성적을 거둔 것은 아니었지만, 조련사 해리 텔퍼드(Harry Telford)의 훈련을 거치며 놀라운 경주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평생 51차례 경주에 출전해 37차례 우승했고, 1930년에는 호주의 대표적인 경마 대회인 멜버른컵을 제패했습니다.
그의 인기가 특별했던 데에는 시대적 배경도 있습니다. 대공황으로 많은 사람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시절, 파 랩의 승리는 국민에게 위안과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빅 레드(Big Red)라는 애칭으로 불린 이 경주마는 단순한 스포츠 스타를 넘어 어려운 시대의 희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930년 멜버른컵을 앞두고 파 랩을 겨냥한 총격 사건이 발생했지만, 그는 무사히 경주에 출전해 우승했습니다. 그러나 1932년 미국에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이후 비소 노출과 관련한 연구와 의혹이 제기되었지만, 정확한 사망 원인을 하나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사후 그의 가죽은 멜버른에, 골격은 뉴질랜드에, 심장은 캔버라에 보존되었습니다. 심장의 무게는 약 6.35kg으로 일반적인 경주마보다 상당히 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심장이 크다는 사실만으로 그의 뛰어난 성적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경주 능력에는 훈련과 체력, 여러 생리적 요인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심장이라는 유물은 강렬한 상징성을 지닙니다. 수많은 관중이 열광했던 경주마의 몸속에서 실제로 뛰었던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보존 용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오래전 경마장의 함성이 조금은 가까워지는 듯합니다.

심장 옆에 놓인 또 하나의 흥미로운 기록은 파 랩의 우승 사진첩(Phar Lap's race wins album)입니다. 소유주 데이비드 데이비스(David Davis)가 간직했던 사진첩으로, 파 랩이 호주에서 거둔 36차례의 우승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진첩에는 경주장에서 촬영한 흑백사진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한 장 한 장이 승리의 순간을 담은 기록입니다. 지금처럼 동영상을 쉽게 저장할 수 없었던 시대에 사진첩은 뛰어난 경주마의 활약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소중한 자료였습니다.
오랫동안 미국의 가족 집에 남아 있던 이 사진첩은 다시 세상에 알려졌고, 2013년 호주 국립박물관이 구입했습니다. 심장이 파 랩의 실제 몸을 기억하게 한다면, 사진첩은 그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열광을 보여줍니다. 두 유물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한 시대의 영웅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호주의 산업과 스포츠가 유물이 되다

경주마의 심장에서 이번에는 자동차로 시선을 옮겨보겠습니다. 홀덴 시제품 1호(Holden Prototype No. 1, 1946)는 호주 자동차 산업의 중요한 출발점을 보여줍니다.
사진 속 자동차는 둥근 전조등과 세로로 길게 배열된 크롬 그릴이 특징입니다. 오늘날의 자동차와 비교하면 차체가 작고 단정해 보이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시대를 향한 기대가 담긴 차량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호주는 자국의 도로와 생활환경에 맞는 승용차를 생산하려 했습니다. 시제품 1호는 1946년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수작업으로 제작되었고, 호주로 옮겨져 다양한 도로에서 시험 주행을 거쳤습니다. 개발 과정에서는 외부에 신차의 모습을 공개하지 않으려는 노력도 이루어졌습니다.
마침내 1948년 11월 29일 호주에서 생산된 홀덴 승용차가 공식적으로 공개되었습니다. 이 양산차가 홀덴 48-215(Holden 48-215)입니다. 박물관의 1946년 시제품과 1948년 양산차는 같은 개발 과정에 속하지만, 동일한 차량은 아닙니다.
홀덴은 이후 호주인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된 자동차 브랜드로 성장했습니다. 가족 여행과 출퇴근, 교외 생활의 확대 속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이동 수단 이상의 의미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산업환경이 바뀌면서 홀덴은 2017년 호주 내 자동차 생산을 중단했습니다.
시제품 1호는 복원 작업을 거쳐 2004년 호주 국립박물관 소장품이 되었습니다. 자동차 한 대를 통해 전후 호주의 산업적 자신감과 생활의 변화, 제조업의 역사를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호주 국민이 사랑한 또 다른 영웅은 크리켓 선수 돈 브래드먼(Don Bradman)입니다. 박물관의 배기 그린 모자(Baggy green cap)는 그가 1946~1947년 애시즈(Ashes) 시리즈에서 착용했던 국가대표 모자입니다.
배기 그린은 호주 크리켓 국가대표 선수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모자입니다. 사진을 보면 짙은 녹색 천 앞면에 호주 국가대표 문장이 새겨져 있습니다. 확대된 사진에는 제작사와 선수 이름이 표시된 안쪽 라벨도 보입니다. 화려한 보석은 없지만, 세월의 흔적과 실제 착용 기록이 유물의 가치를 높여줍니다.
브래드먼은 국제 테스트 크리켓에서 타격 평균 99.94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겼습니다. 크리켓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숫자만으로 그 위대함이 실감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지금도 크리켓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성취 가운데 하나로 평가됩니다.
1946~1947년 애시즈 시리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개된 호주와 잉글랜드의 중요한 크리켓 대결이었습니다. 전쟁의 시간을 지나 스포츠가 다시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는 무대가 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호주 국립박물관은 2025년 이 모자를 43만 8,550호주달러에 구입했습니다. 모자의 재료값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금액입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선수의 업적과 역사적 순간이 물건의 가치를 결정한 것입니다.
파 랩의 심장은 대공황 시대의 희망을, 홀덴 자동차는 전후 산업 발전의 자신감을, 브래드먼의 모자는 스포츠를 통해 형성된 국민적 자부심을 보여줍니다. 이제 관람의 마지막 공간에서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보물은 반드시 영광스러운 순간을 담고 있어야 할까요?
5. 보물의 가치는 누가 결정할까, 유물이 들려주는 호주의 오늘
마지막으로 만날 유물들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녹슨 철문과 낡은 트럭, 작은 취사도구 상자, 흰 면장갑 한 켤레입니다. 그러나 이 평범한 물건들은 호주 사회가 오랫동안 외면했던 역사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행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녹슨 철문이 기억하는 빼앗긴 어린 시절


킨첼라 원주민 소년원 출입문(Kinchela Aboriginal Boys Home gate)은 녹슨 철제 틀과 낡은 철망으로 이루어진 유물입니다. 문 위에는 소년원이라는 뜻의 영문이 남아 있습니다. 장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없지만, 이 철문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느려집니다.
1924년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설립된 킨첼라 소년원은 가족과 강제로 분리된 원주민 소년들을 수용했던 시설입니다. 정부는 교육과 보호를 명분으로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놓았고, 시설에서는 원주민의 언어와 문화를 억압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1970년 폐쇄될 때까지 이곳을 거쳐 간 소년은 400명이 넘었습니다.
이들은 호주 역사에서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s)라고 불리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입니다. 이 표현은 정부와 관련 기관의 정책으로 가족에게서 분리된 원주민 아동들의 경험을 가리킵니다. 아이들은 어린 시절의 일상뿐 아니라 가족과 공동체, 언어와 문화적 연결까지 잃을 수 있었습니다.
사진 속 철문은 1950년 무렵 교체되어 버려졌다가 1990년대 말 다시 발견되었습니다. 이후 해럴드 블루이 스미스(Harold 'Bluey' Smith)가 보관했고, 2012년 호주 국립박물관에 기증되었습니다.
두 번째 사진에서는 철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세대의 사람들이 함께 서 있습니다. 이 장면은 특히 오래 바라볼 만합니다. 한때 아이들의 자유를 제한했던 문이 이제는 그 역사를 기억하고 다음 세대에 전하는 증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쓸모없어진 고철이었겠지만,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결코 평범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박물관이 이 철문을 보존하는 이유도 바로 그 기억에 있습니다.
낡은 트럭 한 대가 이어준 아홉 해의 싸움

다음 유물은 웨이브힐 파업 지원 베드퍼드 트럭(Bedford truck used at Wave Hill Walk-Off)입니다. 녹슨 차체와 노란색 바퀴가 눈에 들어오는 오래된 화물차입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자동차라고 하면 유명한 스포츠카나 최초의 생산 모델을 떠올리기 쉽지만, 이 트럭의 가치는 조금 다른 곳에 있습니다.
1966년 북부 웨이브힐 목장에서 일하던 구린지(Gurindji) 사람들은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하며 일터를 떠났습니다. 빈센트 링기아리(Vincent Lingiari)가 이끈 이 행동은 점차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 대한 권리를 되찾으려는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외딴 지역에서 오랜 시간 투쟁을 이어가려면 의지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사람들은 먹고 살아야 했고, 필요한 물자를 구해야 했습니다. 이때 노동조합 활동가 브라이언 매닝(Brian Manning)이 베드퍼드 트럭을 몰고 지원에 나섰습니다.
매닝은 다윈에서 웨이브힐까지 약 800km에 이르는 길을 오가며 식량과 생필품을 운반했습니다. 그는 7년 동안 적어도 15차례 이 길을 왕복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만만치 않은 거리인데, 당시의 도로 사정과 낡은 트럭을 생각하면 그 여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9년에 걸친 투쟁 끝에 1975년 고프 휘틀럼(Gough Whitlam) 총리는 빈센트 링기아리의 손에 흙을 부어주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구린지 사람들의 토지 반환을 알렸습니다. 이 장면은 호주 원주민 토지권 운동을 대표하는 역사적인 순간으로 남았습니다. 다만 모든 원주민 토지권 문제가 그날 해결된 것은 아니며, 권리 회복을 위한 노력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트럭과 함께 살펴볼 물건은 브라이언 매닝의 터커박스(Brian Manning's tuckerbox)입니다. 터커박스는 음식이나 식사 준비에 필요한 물건을 담는 상자를 뜻하는 호주식 표현입니다. 사진에는 낡은 금속 상자 안에 프라이팬과 냄비, 국자와 수저 같은 취사도구가 들어 있습니다.
이 상자는 매닝이 먼 길을 오가며 생활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권리운동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는 지도자와 중요한 연설, 정치적 결정이 주목받기 쉽습니다. 하지만 실제 운동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식사를 준비하고 물자를 운반하는 일도 필요했습니다.
매닝의 가족과 관계자들은 2016년 트럭과 관련 유물을 박물관에 기증했습니다. 베드퍼드 트럭과 터커박스는 거창한 기념비가 아닙니다. 그러나 구린지 사람들의 투쟁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연대가 이루어졌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흰 장갑 한 켤레가 바꾼 사람들의 마음

마지막으로 만날 유물은 페이스 밴들러의 흰 장갑(Faith Bandler's gloves)입니다. 짧은 흰색 면장갑 한 켤레로, 손등에는 세로 방향의 박음질이 들어가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여성용 소품이지만, 이 장갑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노력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페이스 밴들러(Faith Bandler)는 호주의 원주민 권리운동과 시민권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활동가입니다. 그는 특히 1967년 호주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교회와 지역 모임 등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개정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왜 흰 장갑이 중요한 유물이 되었을까요? 당시 단정한 장갑은 격식 있는 여성 복장의 일부였습니다. 밴들러는 자신이 설득해야 할 청중에게 친숙하고 신뢰할 만한 모습으로 다가가기 위해 옷차림에도 신경을 썼습니다. 정치적 주장을 전달하는 데에는 논리뿐 아니라 상대방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만드는 태도와 전략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1967년 5월 27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는 약 90.8%의 유권자가 헌법 개정에 찬성했습니다. 그 결과 원주민을 특정 인구 산정에서 제외하던 조항이 삭제되었고, 연방의회가 원주민 관련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헌법상 권한도 확대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국민투표가 원주민에게 처음으로 시민권이나 투표권을 부여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차별적인 헌법 조항을 개정하고 원주민 권리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큽니다.
흰 장갑에는 금이나 보석이 없습니다. 값비싼 재료나 뛰어난 세공 기술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 대신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설득하며 변화를 이끌어내려 했던 활동가의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평범한 물건이 역사적 유물이 되는 과정을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 것입니다.
킨첼라의 철문은 가족과 분리된 아이들의 기억을, 웨이브힐의 트럭은 권리를 되찾기 위한 연대를, 페이스 밴들러의 장갑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설득의 힘을 보여줍니다. 이 물건들이 귀중한 이유는 아름답거나 값비싸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람들의 삶이 그 안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 만났던 태즈메이니아의 조개 목걸이부터 마지막 흰 장갑까지, 호주 국립박물관의 유물들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이어줍니다. 박물관을 나설 때쯤이면 보물이라는 말이 조금 다르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어떤 보물은 눈부시게 빛나지만, 어떤 보물은 낡고 녹슨 모습으로 더 깊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