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크로아티아의 고대사를 만나러 자그레브 고고학박물관에 들어서면 이야기는 의외로 작은 물건에서 시작됩니다. 손에 쥘 만한 석기와 흙으로 빚은 그릇, 검은 표면에 기하학 문양을 새긴 부체돌 토기입니다.
그러나 몇 걸음만 더 옮기면 풍경이 달라집니다. 청동 무기 사이에서 황금 장신구가 빛나고, 철기시대의 호박과 유리구슬이 등장합니다. 이후에는 그리스 문자와 로마인의 보석을 지나 마지막에는 이집트 미라를 감싸고 있던 천에서 뜻밖의 에트루리아 문자까지 만나게 됩니다.
약 45만 점의 유물을 소장한 자그레브 고고학박물관은 크로아티아의 옛 물건을 모아 놓은 공간에 머물지 않습니다. 선사시대부터 지중해와 중부유럽 사이를 오간 사람과 기술, 물건과 문화를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거대한 시간의 통로입니다. 가장 오래된 흔적부터 천천히 걸어보겠습니다.

1. 돌과 흙에서 시작된 크로아티아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

첫 장면부터 황금 보물을 기대했다면 조금만 기다려도 좋습니다. 인류의 긴 역사는 왕관이나 금잔보다 훨씬 소박한 물건에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돌을 깨뜨려 만든 날붙이 하나가 당시에는 생존을 좌우하는 최첨단 도구였습니다.
크로아티아 북부의 빈디야 동굴은 이 오래된 시간을 보여주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이곳에서는 약 4만 5천~3만 년 전의 네안데르탈인 유해와 함께 무스테리안 계통의 석기, 뼈로 만든 도구 등이 발견되었습니다. 유럽에서 비교적 늦은 시기까지 살아남았던 네안데르탈인의 흔적을 간직한 곳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큽니다.

시간을 앞으로 돌리면 사냥과 채집을 중심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의 세계에 농경과 정착생활이 자리 잡기 시작합니다. 자그레브 고고학박물관의 석기시대 컬렉션에서 석기와 토기, 골각기를 차례로 살펴보는 재미도 여기에 있습니다. 물건의 변화가 곧 생활방식의 변화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돌도끼 하나에도 정착생활의 변화가 담겨 있다
신석기시대의 마제석기와 돌도끼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표면을 갈아 단단하고 매끄럽게 만든 도끼는 나무를 베고 목재를 가공하는 데 유용한 도구였습니다. 농경과 정착생활이 확대되면서 사람은 주변의 자연을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석기의 뗀석기와 나란히 놓고 보면 차이는 더욱 잘 보입니다. 돌이라는 재료는 같지만 그것을 다루는 방법과 도구에 요구하는 기능은 달라졌습니다. 박물관에서는 이런 작은 차이가 수천 년의 시간을 구분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깨진 토기 조각도 고고학자에게는 기록이다

문자가 없던 시대를 이해할 때 토기는 뜻밖에 수다스러운 유물입니다. 어떤 흙을 골랐는지, 표면을 어떻게 다듬었는지, 어떤 문양을 새겼는지, 그릇의 입구와 몸통을 어떤 비율로 만들었는지를 비교하면 서로 다른 문화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고고학자에게 토기 조각은 버려진 그릇의 파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비슷한 문양과 제작법이 어디까지 퍼졌는지 추적하면 사람들이 이동한 길과 문화가 교류한 범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그릇 한 점도 아름답지만, 때로는 손바닥만 한 파편 하나가 더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부체돌 문화, 검은 토기 위에 기하학을 새기다

이제 전시의 표정이 한층 화려해집니다. 크로아티아 선사문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체돌 문화(Vučedol culture)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도나우강 가까이에 자리한 부체돌은 후기 동기시대를 대표하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이곳에서 나온 토기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짙은 표면을 파내 기하학적 문양을 만들고 그 안에 흰색 재료를 채워 대비를 강조한 장식입니다. 수천 년 전 토기인데도 문양의 반복과 균형이 놀랄 만큼 세련되어 있습니다.
1938년 부체돌에서 진행된 대규모 발굴 자료는 이듬해 수십 개의 상자에 담겨 자그레브로 옮겨졌습니다. 오늘날 박물관의 부체돌 컬렉션에는 장식 토기뿐 아니라 석기와 골각기, 구리 유물까지 남아 있어 한 문화의 생활과 기술을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부체돌 비둘기, 사실 비둘기가 아닐 수도 있다

부체돌 컬렉션의 주인공을 한 점 고른다면 단연 부체돌 비둘기입니다. 1938년 부체돌의 그라다츠 지역에서 발견된 이 유물은 속이 빈 새 모양의 의례용 토기로, 몸체에는 파낸 문양과 흰색 상감 장식이 촘촘하게 이어집니다.
흥미로운 점은 익숙한 이름과 달리 어떤 새를 표현했는지가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둘기로 보는 해석과 자고새로 보는 해석이 함께 존재합니다. 비둘기는 풍요와 여성 신앙의 상징으로, 자고새는 남성 신과 금속 제작의 세계와 연결해 해석하기도 합니다.
용도 역시 평범한 물병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내부에는 약 0.5리터의 액체를 담을 수 있으며, 박물관은 종교 의례에서 액체를 담았던 제의용 용기였을 가능성을 소개합니다. 정확히 무엇을 담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작은 새는 귀엽게 생긴 선사시대 토기에서 끝나지 않고 부체돌 사람들의 의례와 믿음을 상상하게 만드는 유물이 됩니다.
그리고 부체돌에서 한 가지를 더 기억해 두면 좋습니다. 이들은 아름다운 토기만 만들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부체돌의 그라다츠에서는 구리 야금과 관련된 흔적도 확인됩니다. 흙과 돌의 전시를 지나 이제 금속의 시대로 들어갈 차례입니다.
2. 청동과 황금이 말해주는 권력과 신분
금속이 등장하면 전시실의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집니다. 돌과 흙이 생활의 기술을 보여주었다면 청동과 황금은 기술뿐 아니라 부와 신분, 교역과 권력까지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자그레브 고고학박물관에는 선사시대 금 유물만 따로 모은 컬렉션이 있습니다. 모두 92점으로, 기원전 4천년기 말의 동기시대부터 기원전 1천년기 말 철기시대까지 긴 시간을 아우릅니다. 아플리케와 귀걸이, 구슬, 펜던트, 머리장식과 투툴루스 등 형태도 다양합니다.
로바스 보물, 밭에서 나온 500점의 타임캡슐

이 단락에서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유물이 로바스 보물(Lovas Hoard)입니다. 1939년 크로아티아 동부 로바스에서 밭을 갈던 중 우연히 발견된 중기 청동기시대의 대규모 매납 유물입니다.

규모부터 놀랍습니다. 약 500점의 유물이 한데 모여 있었고, 작은 토기 안에는 금선으로 만든 나선 장식 22점이 들어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팔찌와 반지, 장식판, 펜던트, 핀셋, 단검과 도끼, 가공되지 않은 청동 덩어리까지 대부분 청동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보석함이라고 부르기에는 내용물이 너무 다양합니다. 장신구와 무기, 도구와 금속 원료가 한꺼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왜 이 많은 물건을 땅속에 묻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재산을 숨겼다가 되찾지 못했을 수도 있고, 의례적인 목적으로 매납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선사시대의 보물은 반짝이는 물건보다 아직 풀리지 않은 사연 때문에 더 오래 눈길을 붙잡습니다.
금은 작아도 존재감은 작지 않았다
금이 특별했던 이유는 단순히 반짝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잘 부식되지 않고, 두드려 얇게 펴거나 가느다란 선으로 만들 수 있어 작은 양으로도 화려한 장식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사시대 금 장신구를 볼 때는 크기보다 제작법을 살펴보는 편이 재미있습니다. 얇은 금판을 두드리고, 금선을 꼬고, 작은 구멍을 내어 의복에 붙이는 과정에는 상당한 숙련이 필요했습니다. 작은 금 조각 하나에도 금속을 다루는 기술과 미적 감각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장신구는 몸에 걸친 사회적 언어였다

귀걸이와 펜던트, 구슬과 머리장식은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물건이면서 동시에 착용자의 사회적 위치와 소속을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었습니다. 특히 귀금속과 정교한 장신구가 무덤의 다른 부장품과 함께 발견되면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어떤 지위를 가졌는지 추정할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금제 아플리케처럼 옷이나 머리장식에 붙였던 작은 장식은 진열장에서 보면 의외로 소박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여러 장이 의복에 달려 있었다고 상상해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얇은 금판이 빛을 받아 반짝였을 테니, 장신구는 정지된 물건이 아니라 움직이는 사람과 함께 완성되는 장식이었습니다.
청동은 장신구에서 전사의 무기까지 모습을 바꾼다

황금 옆에서 또 하나의 금속이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청동입니다. 청동은 팔찌와 펜던트 같은 장신구가 되기도 했지만 도끼와 단검, 검과 창 같은 무기와 도구로도 변신했습니다.
후기 청동기시대에는 여러 금속품을 한꺼번에 땅에 묻은 이른바 매납 유물 또는 호드(hoard)가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자그레브 고고학박물관의 관련 컬렉션에는 수천 점의 청동 유물이 포함되어 있으며, 낫과 도끼, 검, 장신구와 가공 전 청동까지 구성도 다양합니다.
왜 귀한 금속을 다시 꺼내기 어려운 땅속에 묻었을까요. 전쟁이나 위험을 피해 숨겨 둔 재산이라는 설명도 있고, 신에게 바친 봉헌물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청동을 일시적으로 유통에서 빼내 가치와 공급을 조절하려 했다는 견해까지 있습니다. 아직 하나의 답으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흥미롭습니다.
철기시대가 되면 옷차림도 역사의 단서가 된다

철기시대로 넘어가면 금속이 철로 완전히 교체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기와 도구에서는 철의 비중이 커지지만 장신구의 세계에서는 청동과 귀금속, 유리와 호박이 여전히 중요한 재료로 사용됩니다.

이때 유심히 볼 물건이 피불라(fibula)입니다. 오늘날의 브로치나 안전핀처럼 옷을 여미는 데 사용했지만, 시대와 지역에 따라 형태와 장식이 크게 달랐습니다. 덕분에 고고학자에게 피불라는 단순한 패션 소품이 아니라 유적의 시기와 문화적 관계를 살펴보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야포드의 호박 장신구에는 먼 교역로가 숨어 있다

철기시대 전시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 야포드(Japodes) 컬렉션입니다. 야포드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리카와 고르스카 지역을 중심으로 살아갔던 집단으로, 자그레브 고고학박물관에는 이들과 관련된 유물이 2만 1천 점 이상 보관되어 있습니다.
특히 프로조르(Prozor)와 콤폴리에(Kompolje)의 대규모 네크로폴리스에서 나온 무덤 부장품이 중요합니다. 무기와 토기도 있지만 가장 시선을 끄는 것은 역시 장신구입니다. 청동 고리와 펜던트, 피불라뿐 아니라 유리와 호박을 이용한 장식품이 놀랄 만큼 다양합니다.

야포드 여성의 머리장식도 흥미롭습니다. 여러 개의 청동 고리를 연결해 만든 모자 형태의 장식이나 청동판으로 만든 머리장식이 있었고, 여기에 작은 펜던트를 더하기도 했습니다. 원래는 가죽이나 직물 같은 유기물 위에 금속 장식을 부착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지금 진열장에 남은 청동 조각만 보고 당시의 화려함을 판단해서는 곤란합니다.

그중에서도 호박은 특별합니다. 자그레브의 야포드 컬렉션에는 작은 구슬부터 여러 개를 연결한 목걸이와 가슴장식까지 다양한 호박 제품이 남아 있습니다. 콤폴리에에서는 사람의 머리 형태로 조각한 호박 구슬까지 발견되었습니다.
호박은 이 지역에서 흔하게 얻을 수 있는 재료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이런 장신구는 단순한 꾸밈새를 넘어 먼 지역과 연결된 교류망을 생각하게 합니다. 진열장 안의 작은 호박 구슬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시선은 리카의 산악지대를 벗어나 훨씬 넓은 유럽으로 향합니다.
여기까지 걸어오면 크로아티아의 선사시대가 하나의 문화로 이루어져 있지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부체돌의 토기를 만들던 사람들, 청동과 황금을 다루던 장인들, 독특한 복식과 호박 장신구를 남긴 야포드까지 서로 다른 문화가 이 땅에 층층이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다음 전시부터 지도의 범위는 더욱 넓어집니다. 아드리아해를 건너온 그리스 문화와 북쪽에서 움직인 켈트계 집단이 등장하면서 크로아티아는 지중해와 중부유럽이 만나는 교차로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3. 그리스와 켈트, 아드리아해에서 문명이 만나다
선사시대 전시를 지나면 지도의 범위가 갑자기 넓어집니다. 아드리아해를 건너온 그리스인과 해안의 식민도시, 북쪽과 판노니아 평원에서 활동하던 켈트계 집단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크로아티아는 유럽 변방의 조용한 땅이 아니었습니다. 지중해와 중부유럽을 잇는 길목을 따라 사람과 상품이 움직였고, 그들과 함께 화폐와 문자, 종교와 미술 양식도 이동했습니다. 이제 유물을 보는 재미도 달라집니다. 어느 지역에서 만들었는지만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가가 중요해집니다.
그리스 도기는 바다를 건너온 작은 그림책이다

자그레브 고고학박물관은 그리스와 남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채색 도기 컬렉션으로도 유명합니다.
검은색과 붉은색으로 인물과 신화를 표현한 도기를 가까이에서 보면 이것을 단순한 식기로 부르기 어려워집니다. 신과 영웅, 전사와 운동선수, 연회와 일상의 장면이 둥근 그릇을 따라 이어집니다.
흑화식에서는 검게 표현된 인물의 세부를 날카롭게 긁어냈고, 이후 발전한 적회식에서는 인물을 점토 본래의 붉은색으로 남기고 주변을 검게 칠했습니다. 붓으로 세부를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인체의 움직임과 옷주름도 한층 자연스러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도기는 그릇이면서 동시에 고대인이 읽었던 이미지의 세계이기도 합니다. 문자가 없어도 신화와 영웅의 이야기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 당시 사람에게 익숙한 장면이 그릇 위에서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룸바르다 비문은 식민도시의 탄생을 돌에 기록했다
화려한 도기 옆에서 자칫 지나칠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는 훨씬 묵직한 유물이 있습니다. 룸바르다 프세피스마(Lumbarda Psephisma)입니다.


코르출라섬 룸바르다의 콜루드르트에서 발견된 이 비문은 기원전 3세기 초 무렵 세워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기록의 주인공은 인근 비스섬의 그리스 도시 이사(Issa)에서 건너온 정착민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문이 단순히 누군가의 이름을 기념한 돌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새로운 농업 정착지를 만들면서 토지를 어떻게 나누고 공동체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기록했습니다. 새로 발견된 비문 조각을 통해 초기 정착민들이 각각 네 플레트라에 해당하는 토지를 배분받았다는 사실도 보다 분명해졌습니다.
토기 한 점이 그리스 문화가 아드리아해를 건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면, 룸바르다 비문은 그 사람들이 실제로 이곳에 정착하고 땅을 나누며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장면을 문자로 보여줍니다. 고대 식민도시가 탄생하는 순간을 돌에 적어 놓은 기록인 만큼 박물관의 대표 유물로 꼽힐 만합니다.
켈트인은 그리스 화폐를 자기 방식으로 다시 만들었다
전시에서 화폐까지 살펴보면 문화가 이동하는 방식이 더욱 흥미로워집니다. 판노니아 평원에서 활동하던 켈트계 집단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화폐를 접한 뒤 그것을 모델로 자신들의 은화를 만들었습니다.

특히 필리포스 2세의 화폐에 등장하는 제우스의 머리와 기마상은 동부 켈트 화폐에서 자주 반복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필리포스 3세의 화폐 역시 중요한 모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베끼지는 않았습니다. 세대를 거쳐 다시 주조되는 동안 얼굴과 말의 형태가 점점 단순해지고 때로는 거의 추상적인 모습으로 변합니다. 원본을 충실하게 복제하는 대신 자신들에게 익숙한 시각 언어로 다시 해석한 것입니다.
작은 은화 한 닢에서 거대한 교역망이 보인다
화폐는 크기가 작아 전시실에서 지나치기 쉽습니다. 하지만 고대의 이동과 교역을 추적할 때는 상당히 강력한 자료입니다.

어느 지역에서 주조된 동전이 멀리 떨어진 유적에서 발견된다면 사람과 상품이 그 길을 오갔다는 흔적이 됩니다. 여기에 화폐의 무게와 금속 성분, 도상의 변화를 함께 비교하면 경제권과 정치적 영향이 어디까지 퍼졌는지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켈트 은화 한 닢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작은 금속 조각이 지도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케도니아에서 판노니아로, 다시 아드리아해 주변으로 이어진 문화와 경제의 연결망이 그 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전시의 주도권은 로마가 가져갑니다. 다음 공간에서는 돌과 금속뿐 아니라 유리와 보석, 화폐와 초상 조각까지 등장하면서 고대인의 얼굴과 일상이 훨씬 가까이 다가옵니다.
4. 로마가 남긴 얼굴과 보석, 그리고 일상의 흔적

로마 전시로 들어오면 유물의 종류가 부쩍 많아집니다.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이 있고, 손가락에 끼웠던 반지가 있으며, 식탁에서 사용한 그릇과 향유를 담았던 유리병도 있습니다.
거대한 제국을 이해하는 방법이 반드시 개선문과 황제 조각뿐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작은 생활용품을 보고 있으면 로마인이 무엇을 먹고, 어떻게 꾸미고, 어떤 물건을 사용하며 하루를 보냈는지가 훨씬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살로나의 젊은 여성은 정말 플라우틸라였을까

자그레브 고고학박물관을 대표하는 로마 초상 가운데 하나가 살로나, 오늘날 솔린에서 온 젊은 여성의 대리석 두상입니다. 흔히 솔린의 여인이라 불리며, 카라칼라의 아내였던 풀비아 플라우틸라를 표현했을 가능성이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름표를 너무 빨리 붙이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정확한 발굴 상황이 전해지지 않아 실제 플라우틸라인지, 황실 여성의 유행을 따라 자신을 표현한 상류층 여성인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대신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은 눈 부분이 텅 비어 있지만 원래는 색이 있는 유리 페이스트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매끄럽게 연마된 밝은 얼굴과 어두운 머리카락, 색이 들어간 눈이 함께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생생한 인상이었을 것입니다.
머리 모양도 놓치기 아깝습니다. 로마 여성의 헤어스타일은 시대에 따라 빠르게 변했고 황실 여성의 유행은 제국 곳곳으로 퍼졌습니다. 덕분에 오늘날 고고학자는 머리카락을 장식한 방식까지 초상의 연대와 정체성을 추적하는 단서로 사용합니다. 돌로 만든 초상이 패션 자료 역할까지 하는 셈이라는 표현 대신, 로마의 유행이 대리석에 그대로 굳어 남았다고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로마인은 손가락 위에도 작은 신화를 올렸다

대리석 초상에서 시선을 아래로 낮추면 전혀 다른 크기의 예술품이 기다립니다. 로마의 금·은 장신구와 젬(gem)입니다.

젬은 보석이나 준보석에 신과 인물, 동물과 상징을 정교하게 새긴 물건입니다. 음각으로 파낸 인탈리오는 반지에 끼워 장식하는 동시에 밀랍 등에 찍어 인장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습니다.
카넬리언이나 재스퍼처럼 손톱만 한 돌 안에 사람의 옆얼굴과 옷주름, 신화 속 인물을 새겨 넣은 작품을 보면 확대 사진이 필요한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대리석 조각이 전시실을 장악하는 예술이라면 젬은 눈을 가까이 가져가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예술입니다.
유리병은 로마인의 세련된 일상을 보여준다
로마 유리 제품 앞에서도 잠시 멈춰볼 만합니다. 얇고 투명한 병과 청록색 용기 가운데에는 현대의 화장품 병과 나란히 놓아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만큼 세련된 형태가 있습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유리 불기 기술이 확산되면서 유리 용기의 생산은 이전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바뀌었습니다. 향유와 화장품을 담는 작은 병부터 컵과 접시, 저장용기까지 쓰임도 다양해졌습니다.
유리는 깨지기 쉬운 재료이기 때문에 온전한 형태로 남은 고대 유리병을 보면 더욱 놀랍습니다. 빛이 유리 표면을 통과하는 순간에는 로마의 일상이 갑자기 2천 년이라는 시간에서 빠져나와 눈앞으로 다가오는 듯합니다.
안다우토니아에서는 로마인의 하루가 보인다



자그레브에서 멀지 않은 Šćitarjevo에는 로마 도시 안다우토니아(Andautonia)의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2세기에 이르면 도로망과 배수시설, 공공건물과 주거시설을 갖춘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이곳에서 나온 유물은 의외로 친근합니다. 토기 컵과 접시, 유리 용기와 동전이 있고 뼈와 도자기로 만든 게임용 말, 저금통과 은제 피불라도 발견되었습니다.
게임용 말을 보고 있으면 로마인이 갑자기 교과서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시장에서 돈을 쓰고, 그릇에 음식을 담고, 장신구로 옷을 여미고, 여가에는 게임도 즐겼습니다. 거대한 로마 제국 역시 결국 이런 하루를 살았던 사람들의 도시가 모여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트라야누스의 금화에는 황제의 얼굴이 여행하고 있다
안다우토니아의 생활용품 사이에서 로마 화폐도 놓치기 아깝습니다. 황제의 초상이 새겨진 동전은 돈이면서 동시에 제국 곳곳을 이동하는 작은 정치 매체였습니다.

안다우토니아에서는 98~99년에 주조된 트라야누스 황제의 금화와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청동화도 발견되었습니다. 로마 시민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세금을 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황제의 얼굴과 이름을 반복해서 접했습니다.
사진과 방송이 없던 시대에 황제의 초상이 수천 킬로미터를 여행할 수 있었던 매체가 바로 화폐였습니다. 손바닥보다 작은 동전 하나에 경제와 권력이 동시에 새겨져 있는 이유입니다.
로마 이후, 돌에 크로아티아 통치자의 이름이 나타난다
로마 제국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박물관의 시간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중세 컬렉션으로 넘어가면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기록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유물이 브라니미르 비문입니다. 스플리트 인근 고르니 무치(Gornji Muć)에서 발견된 제단 칸막이의 석조 조각으로, 브라니미르 공작의 이름과 888년이라는 연대가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이 숫자가 중요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선사시대 유물에서는 형태와 재료를 비교하며 사람들의 시대를 추적해야 했지만 이제 돌 위에서 특정 통치자의 이름과 연도를 직접 읽을 수 있습니다.
첫 전시실의 이름 없는 석기 제작자에서 시작했던 여행이 수천 년을 지나 마침내 이름과 연도를 가진 역사 속 인물에게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박물관은 여기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한 번 더 관람객을 데려갑니다.
5. 이집트 미라에서 에트루리아의 책이 발견되다

여기까지 왔다면 크로아티아 고고학 여행도 거의 끝났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전시에서 갑자기 이집트가 등장합니다.
자그레브 고고학박물관의 이집트 컬렉션에는 신상과 조각, 장신구와 화장용품, 파피루스와 우샤브티, 석관과 미라 등 다양한 장례·생활 유물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크로아티아 고고학의 마지막에 덧붙인 몇 점의 이국적인 기념품이 아니라 독립된 세계를 이루는 컬렉션입니다.
작은 우샤브티는 사후세계의 일꾼이었다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작은 사람 모양의 우샤브티(ushabti)입니다. 고대 이집트인은 죽은 뒤에도 현실 세계와 비슷한 활동이 이어진다고 생각했고, 사후세계에서 죽은 사람을 대신해 노동하도록 작은 인형을 무덤에 넣었습니다.
왕과 귀족의 거대한 석관에 비하면 손바닥만 한 물건이지만, 죽음 이후에도 삶이 계속된다고 믿었던 이집트인의 세계관은 이 작은 인형 안에 놀라울 정도로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카노푸스 단지는 몸을 보존하는 장례 의식의 일부였다

미라를 만들 때 몸만 보존한 것은 아닙니다. 미라 제작 과정에서 꺼낸 일부 장기는 별도로 처리해 카노푸스 단지에 보관했습니다.
후대에는 호루스의 네 아들을 상징하는 사람과 동물 머리 형태의 뚜껑이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용기를 보고 있으면 미라 제작이 단순한 방부 기술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의 사후세계를 준비하는 복잡한 종교 의식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그레브 미라를 만난다

그리고 이집트 컬렉션의 끝에서 박물관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유물을 만나게 됩니다. 흔히 자그레브 미라라고 불리는 여성 미라입니다.
1986년 실시된 방사선 조사에서는 골격의 특징을 통해 사망 당시 나이가 약 30~40세였던 여성으로 확인되었고,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는 대략 기원전 390년 무렵을 가리킵니다.
이 미라는 크로아티아 출신의 미하엘 바리치가 1847년 또는 1848년 이집트를 여행하면서 구입했습니다. 그가 1859년 세상을 떠난 뒤 유언에 따라 미라와 관련 유물은 자그레브의 국립박물관으로 들어왔습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19세기 유럽의 수집가가 이집트에서 미라를 구입해 고국의 박물관에 남긴 이야기입니다. 자그레브 미라가 특별해지는 것은 그 다음부터입니다.
그런데 미라의 붕대에 이집트 문자가 없었다
미라를 감싸고 있던 천에는 검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당연히 이집트와 관련된 글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니었습니다.
1892년 빈의 이집트학자 야코프 크랄(Jakob Krall)이 천에 적힌 문자를 연구한 끝에 그것이 에트루리아어라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여기서 이야기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이집트에서 미라로 만들어진 여성의 몸을 감싼 천에 이탈리아 반도의 에트루리아인이 사용했던 언어가 적혀 있었던 것입니다. 이집트 미라 한 구가 순식간에 지중해 여러 문명을 연결하는 고고학적 수수께끼로 변했습니다.
3.4미터의 천이 세계에서 가장 긴 에트루리아 문서를 남겼다

미라를 감쌌던 천은 오늘날 자그레브 리넨북(Liber Linteus Zagrabiensis)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펼친 길이는 약 340cm입니다. 글은 12개의 칼럼으로 나뉘어 있고 약 1,130개의 단어가 확인됩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긴 에트루리아어 문헌이며, 고대의 리넨 책 자체가 실제 형태로 살아남은 유일한 사례로 평가됩니다.
글씨는 주로 검은 잉크로 쓰였고 각 칼럼의 구획에는 붉은색 안료도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다섯 개의 긴 천 조각으로 나뉘어 있지만 원래는 접어서 넘길 수 있는 리넨 책이었던 것으로 해석됩니다.
에트루리아어가 완전히 해독된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문장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들의 이름과 제물, 특정 의례와 날짜를 나타내는 표현이 반복되어 일종의 종교 의례력 또는 전례 문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이집트 여성과 에트루리아 책은 왜 함께 있었을까
그리고 가장 재미있는 질문이 남습니다. 이탈리아 반도의 에트루리아인이 작성한 책은 어떻게 이집트까지 갔고, 왜 한 여성의 미라를 감싸는 천이 되었을까요.
아직 정확한 과정은 알 수 없습니다. 에트루리아계 사람들이 이집트에 거주했을 가능성도 거론되고, 이미 오래된 문서였던 천이 어떤 경로로 이집트에 들어와 미라 제작에 재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하나를 확정된 답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답이 없기 때문에 이 유물이 더 오래 기억됩니다. 이집트 여성의 미라를 연구하다가 세계에서 가장 긴 에트루리아어 문헌을 발견했으니, 고고학에서 유물의 첫인상을 얼마나 조심해야 하는지를 이보다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도 드뭅니다.
박물관을 나설 때 크로아티아의 지도가 조금 달라진다
처음 만났던 것은 돌도끼와 토기였습니다. 이어 부체돌의 검은 토기와 황금 장신구를 지나 야포드의 호박 장신구와 켈트 은화를 만났습니다. 아드리아해에서는 그리스인이 도시를 만들고 비문을 남겼으며, 로마인은 도로와 도시, 유리병과 반지, 화폐를 남겼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집트 미라를 감싸고 있던 천에서 에트루리아인의 책까지 나타났습니다.
이 정도를 보고 나면 자그레브 고고학박물관을 크로아티아의 옛 물건을 모아 놓은 장소라고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아드리아해와 도나우, 지중해와 중부유럽 사이에 놓인 이 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과 물건, 문자와 기술이 오갔는지를 보여주는 거대한 교차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박물관을 나설 때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황금의 반짝임이나 미라의 신비로움 하나만은 아닐 것입니다. 수천 년 동안 서로 다른 사람들이 남긴 작은 물건 하나하나가 연결되면서 오늘날 크로아티아라고 부르는 땅의 긴 역사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