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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바니아라는 나라가 생기기 수천 년 전, 이 땅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요?

     

    티라나의 국립 고고학 박물관(National Archaeological Museum of Tirana)에 들어서면 선사시대의 석기부터 청동 투구, 화려한 고대 도기와 로마 조각까지 서로 다른 시대의 유물이 그 대답을 들려줍니다.

     

    작은 돌에 남은 가공 흔적에서 출발해 일리리아와 그리스 세계가 만난 흔적을 지나 로마 시대까지, 몇 개의 전시실을 걷는 동안 수천 년의 알바니아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이 자리한 석조 건물과 열주형 외관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 길게 이어진 석조 열주가 인상적인 건물로, 알바니아의 선사시대부터 고대에 이르는 고고학 유물을 만날 수 있다. Pudelek (Marcin Szala)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1. 알바니아의 첫 장면은 작은 돌에서 시작된다

    사람은 글을 남기기 전에 도구를 남겼다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 내부 전시실의 고대 조각상과 토기·소형 유물 진열장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 전시실. 고대 조각과 토기, 생활 유물 등이 진열장을 따라 전시되어 있어 알바니아 고고학 컬렉션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Adert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시간은 화려한 조각이나 황금 장신구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처음 만나는 것은 선사시대 사람들이 남긴 석제 도구와 토기입니다.

     

    조금 소박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자가 없던 시대에는 이런 물건 하나하나가 기록문서의 역할을 합니다. 돌을 어디에서 깨뜨렸는지, 날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표면을 얼마나 다듬었는지를 살펴보면 당시 사람들이 재료를 이해하고 도구를 만드는 방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중기 신석기시대 석제 도구
    중기 신석기시대의 석제 도구. 돌을 깨뜨리고 다듬어 날을 만든 흔적이 표면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Yastay / Wikimedia Commons / CC0 1.0

     

    중기 신석기시대의 석제 도구를 가까이에서 보겠습니다. 매끈한 완제품에 익숙한 눈에는 투박해 보이지만, 표면에는 돌을 깨뜨리고 필요한 부분을 다듬어 날을 만든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특정 유물을 도끼나 칼이라고 성급하게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정확한 용도를 알기 어려운 석기도 많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주목할 것은 단단한 돌에서 원하는 형태와 날을 만들어낸 기술입니다.

     

    어느 방향으로 힘을 가해야 원하는 조각이 떨어져 나가는지, 어느 부분을 잡고 어느 부분을 날로 사용할지 사람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익혀갔습니다. 작은 석기 하나에도 수많은 시행착오와 축적된 기술이 숨어 있습니다.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말리크 출토 동기시대 구멍 뚫린 석제 유물
    알바니아 남동부 말리크(Maliq)에서 출토된 동기시대 석제 유물. 돌을 다듬고 여러 개의 구멍을 정교하게 뚫은 가공 기술을 보여준다. Yastay / Wikimedia Commons / CC0 4.0

     

    시대를 조금 앞으로 옮기면 알바니아 남동부 말리크(Maliq)에서 출토된 동기시대 석제품을 만나게 됩니다. 사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돌에 뚫린 여러 개의 구멍입니다.

     

    사진만으로 이 유물의 정확한 용도를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단단한 돌을 일정한 형태로 다듬고 구멍까지 낼 정도로 석재 가공 기술이 정교해졌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동기시대’라는 이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구리 같은 금속이 등장했다고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돌을 버린 것은 아닙니다. 새로운 재료를 받아들이면서도 익숙하고 유용한 석기는 계속 사용했습니다. 기술의 변화는 낡은 것을 한순간에 버리는 교체보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이 한동안 공존하는 과정에 가까웠습니다.

     

    거대한 신전도 왕의 이름도 남지 않은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작은 석기에는 사람들이 재료의 성질을 이해하고 더 나은 도구를 만들기 위해 고민했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알바니아의 긴 고고학 여행이 이런 작은 돌에서 시작되는 이유입니다.

     

    돌을 지나 금속이 등장하자 세상이 달라졌다

    청동 투구를 중심으로 무기와 그릇, 장신구 등 다양한 금속 유물이 전시된 모습. 돌을 사용하던 시대에서 금속 도구와 무기가 확산되며 달라진 물질문화를 보여준다. Kidvoyage / Archaeological Museum of Alicante MARQ (Alicante): 2026 Prices, Hours & Family Guide 참고한 AI재현

     

    이제 재료가 달라집니다. 돌과 토기 중심의 세계에 청동과 철로 만든 도구와 무기, 장신구가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금속을 다루는 일은 석기를 만드는 것과는 또 다른 기술을 요구했습니다. 광석을 확보하고 높은 온도에서 제련한 뒤, 녹인 금속을 거푸집에 붓거나 두드려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작은 금속 유물 하나에도 채광과 운송, 제련과 가공이라는 긴 과정이 숨어 있습니다.

     

    4~6세기 정착지와 묘지 출토 토기와 금속 도구를 참고해 재현한 전시 이미지
    4~6세기 정착지와 묘지에서 출토된 토기와 등잔, 창촉과 농기구 등 다양한 생활 유물을 참고해 구성한 이미지. Archaeological Museum of Alicante MARQ (Alicante): 2026 Prices, Hours & Family Guide 참고 / AI 재현

     

    위 이미지는 시대가 훨씬 뒤인 4~6세기의 토기와 금속 도구를 참고한 재현 자료이지만, 금속이 생활 속으로 들어온 뒤 얼마나 다양한 물건으로 활용됐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무기뿐 아니라 농기구와 생활도구까지 금속의 쓰임은 계속 넓어졌습니다.

     

    금속의 확산은 단순히 도구의 재료가 바뀐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전문 장인이 등장하고 원료와 완성품이 이동하면서 교역망도 넓어졌습니다. 더 단단한 무기와 농기구는 전쟁과 생산 방식에도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시간을 지나면 서부 발칸의 고대사에서 중요한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일리리아(Illyria)입니다.

     

    2. 투구를 쓴 일리리아인, 전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바스타르의 청동 투구, 전쟁과 교류를 함께 보여주다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기원전 5세기 코린트식 청동 투구
    티라나 인근 바스타르(Bastar)에서 발견된 기원전 5세기 코린트식 청동 투구. 눈과 코를 보호하는 특유의 형태와 오랜 세월 청동 표면에 생긴 녹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Fanny Schertzer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이제 박물관의 핵심 구간으로 들어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익숙한 사람에게도 일리리아인(Illyrians)은 조금 낯선 이름입니다. 고대 문헌에서 이 이름은 아드리아해 동쪽과 서부 발칸의 여러 집단을 가리키는 데 사용됐으며, 오늘날 알바니아 지역 역시 그 세계의 중요한 무대였습니다.

     

    사진 속 유물은 티라나 인근 바스타르(Bastar)에서 발견된 기원전 5세기의 코린트식 청동 투구입니다. 눈과 코, 양쪽 뺨을 감싸도록 만든 형태부터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이 투구에서 눈여겨볼 것은 방어력만이 아닙니다. 한 장의 청동을 머리에 맞는 입체적인 형태로 가공하고 얼굴을 보호하도록 정교하게 설계했다는 사실 자체가 당시 금속공예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름도 중요합니다. 이 유물은 코린트식 투구입니다. 오늘날 알바니아에서 발견됐다고 해서 곧바로 일리리아인만의 독자적인 투구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이런 형태의 무기와 제작기술은 그리스와 발칸 여러 지역을 오갔습니다.

     

    오히려 그 사실이 더 흥미롭습니다. 바스타르의 투구는 고대 알바니아가 주변 세계와 단절된 변방이 아니라, 무기와 기술, 문화가 끊임없이 이동하던 발칸의 교류망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옷핀 하나에도 고대인의 취향이 담겼다

    기원전 9~8세기 나선형 장식의 청동 피불라와 고대 청동 장신구
    기원전 9~8세기의 청동 피불라. 청동선을 여러 겹의 나선으로 감아 만든 독특한 형태에서 당시의 정교한 금속 가공 기술을 엿볼 수 있다. Zde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 이 유물은 아테네 파울 앤 알렉산드라 카넬로풀로스 박물관(Kanellopoulos Museum) 소장품입니다.

     

    전사의 투구에서 잠시 눈을 돌려 일상으로 가보겠습니다. 고대인의 옷차림을 이해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물건이 피불라(fibula)입니다. 위 사진은 티라나 박물관 소장품이 아니라 아테네 카넬로풀로스 박물관의 기원전 9~8세기 청동 피불라로, 고대 피불라의 형태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 자료입니다.

     

    피불라는 쉽게 말하면 고대의 옷핀입니다. 단추와 지퍼가 없던 시대에는 천이나 망토를 여미고 고정하는 데 이런 금속 장치를 사용했습니다. 구조만 놓고 보면 오늘날의 안전핀과도 제법 닮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실용적인 물건을 실용적으로만 두지 않았습니다. 금속선을 둥글게 감고 형태를 변형하거나 표면에 장식을 더해 몸을 꾸미는 장신구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래서 피불라는 작은 물건이지만 꽤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당시 사람들이 어떤 옷을 입었는지뿐 아니라 금속을 얼마나 정교하게 다뤘고, 무엇을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까지 짐작하게 합니다.

     

    투구가 고대 발칸의 전쟁과 교류를 보여준다면 피불라는 그보다 훨씬 사적인 세계, 사람들의 옷차림과 취향을 보여줍니다. 역사는 전쟁터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작은 옷핀 하나가 알려줍니다.

     

    3. 아폴로니아의 항아리를 보면 아드리아해가 좁아진다

    그리스계 도시가 성장하자 물건과 취향이 바다를 건너왔다

    아폴로니아 출토 흑화식 암포라를 참고해 재현한 고대 그리스 도기
    알바니아 아폴로니아에서 출토된 흑화식 암포라를 참고한 재현 이미지. 밝은 바탕 위에 검은색으로 표현한 인물과 말, 식물 문양에서 고대 그리스 흑화식 도기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Aleksandra Mano / Iliria 11-2 (1981) / Persée 자료 참고 / AI 재현

     

    이제 전시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알바니아의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해 연안에서는 고대에 디라키움(Dyrrachium), 아폴로니아(Apollonia), 오리쿰(Oricum) 같은 도시들이 성장했습니다. 바다는 이들을 갈라놓는 경계가 아니라 사람과 물건이 이동하는 길이었습니다.

     

    그 흔적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유물 가운데 하나가 도기입니다. 아폴로니아 네크로폴리스에서는 흑화식 암포라(black-figure amphora)를 비롯한 다양한 그리스계 도기가 발견됐습니다.

     

    암포라는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형태의 그릇입니다. 다만 모든 암포라가 운송용 용기는 아니었습니다. 용도와 형태가 다양했고, 인물이나 신화 장면을 그린 장식 도기는 장례와 의례의 맥락에서도 발견됩니다.

     

    티라나의 고고학 컬렉션에는 아폴로니아 네크로폴리스에서 발견된 높이 약 43cm의 흑화식 암포라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조각으로 깨진 상태에서 다시 맞춰 복원된 유물입니다.

     

    여기에서 더 흥미로운 것은 그릇의 아름다움보다 어디에서 만들어지고 어떻게 이동했는가입니다. 도기의 형태와 제작기법을 추적하면 아폴로니아가 그리스 세계와 아드리아해 건너 남부 이탈리아, 그리고 발칸 내륙의 공동체를 잇는 교류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디오니소스가 그릇 위에 등장한 이유

    디오니소스의 탄생 장면이 묘사된 기원전 400~380년경 아풀리아 적회식 크라테르디오니소스와 춤추는 마이나스가 묘사된 기원전 5세기 남부 이탈리아계 적회식 크라테르
    (좌) 기원전 400~380년경 남부 이탈리아 아풀리아에서 제작된 적회식 크라테르.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나는 디오니소스를 중심으로 여러 신과 인물이 붉은색으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우) 기원전 5세기 남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적회식 크라테르. 중앙의 디오니소스와 주변 인물들이 붉은색으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적회식 도기의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Fabrizio Garrisi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사진 속 두 작품은 아폴로니아 출토품이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적회식 크라테르입니다. 아폴로니아에서 발견된 남부 이탈리아계 도기를 이해하기 위한 비교 자료로 함께 보겠습니다.

     

    왼쪽 크라테르에는 제우스의 허벅지에서 태어나는 디오니소스가, 오른쪽에는 춤추는 마이나스와 함께 있는 디오니소스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포도주와 축제의 신이 포도주를 섞는 그릇에 등장한다는 점도 꽤 절묘합니다.

     

    크라테르(krater)는 고대 그리스의 연회에서 포도주와 물을 섞는 데 사용한 큰 그릇입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이 큰 혼합용기에 포도주와 물을 준비한 뒤 작은 잔에 덜어 마셨습니다.

     

    하지만 크라테르는 단순한 술통이 아니었습니다. 넓은 표면에는 신과 영웅, 연회와 의례 같은 장면이 그려졌습니다. 그릇과 회화, 그리고 이야기가 하나의 물건 안에서 만난 것입니다.

     

    검은 그릇 위에 펼쳐진 이야기, 도기는 고대의 그림책이었다

    적회식 도기를 조금 더 가까이 보겠습니다. 이름 그대로 인물은 점토 본래의 붉은색으로 남기고 주변을 검게 처리하는 방식입니다. 가느다란 선을 이용해 얼굴과 옷주름, 신체의 움직임도 비교적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아폴로니아 출토 고대 그리스 적회식 크라테르
    아폴로니아에서 발견된 적회식 도기. 검은 바탕에 붉은색 인물과 신화적 장면을 섬세하게 그려 넣어, 도기가 고대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시각 매체였음을 보여준다. Shqiptarja.com 자료 참고 / AI 재현

     

    사진처럼 검은 바탕 위에 붉은 인물이 떠오르면 그릇의 표면은 작은 화폭으로 변합니다. 도공은 인물의 자세와 복식, 몸의 방향을 이용해 한 장면 안에서도 이야기가 진행되는 느낌을 만들어냈습니다.

     

    아폴로니아 출토 인물 장식 적회식 크라테르
    아폴로니아에서 발견된 적회식 크라테르. 검은 바탕에 인물과 복식, 생활 장면을 붉은색으로 세밀하게 표현해 고대 도기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그림책’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Shqiptarja.com 자료 참고 / AI 재현

     

    더 재미있는 것은 그림이 평평한 벽이 아니라 둥근 그릇 위에 그려졌다는 점입니다. 그릇을 돌리면 다른 인물이 나타나고 장면도 이어집니다. 보는 사람의 손과 시선이 움직여야 그림 전체를 읽을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이런 도기를 단순한 ‘옛날 그릇’으로만 보면 아깝습니다. 신화와 의례, 연회와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 도기는 당시의 취향과 이야기를 전달하는 고대의 시각 매체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도기가 아폴로니아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은 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물건만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닙니다. 도기를 만드는 기술과 그림의 양식, 신화와 취향도 함께 이동했습니다.

     

    아폴로니아의 도기 앞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아름다운 그릇 몇 점만이 아닙니다. 아드리아해를 사이에 두고 서로 연결되어 있던 고대 지중해 세계가 그 작은 표면에 함께 남아 있습니다.

     

    4. 로마 시대의 조각과 비문에는 사람의 얼굴과 이름이 남았다

    대리석 조각을 보면 2천 년의 시간이 함께 보인다

    아폴로니아의 화려한 도기를 지나면 전시실의 분위기가 다시 달라집니다. 이번에는 로마 시대의 대리석 조각과 인물상이 시선을 끕니다.

     

    로마는 여러 차례의 전쟁을 거쳐 서부 발칸으로 세력을 넓혔고, 오늘날 알바니아에 해당하는 지역도 점차 로마 세계에 편입되었습니다. 그 변화는 도시와 도로, 건축뿐 아니라 전시실에 남은 조각과 비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대리석 조각과 인물 흉상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조각 전시실. 대리석 흉상과 신체 일부가 결손된 인물 조각을 통해 고대 조각이 지나온 긴 시간을 엿볼 수 있다.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 조각 전시실 자료 참고 / AI 재현

     

    진열장 안에 들어간 작은 유물과 달리 대리석 조각은 전시 공간 자체를 바꿔놓습니다. 사람의 얼굴과 몸을 실제 크기에 가깝게 표현한 조각 앞에 서면 갑자기 고대인이 우리와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로마 시대 대리석 여성 두상
    (좌) 아폴로니아에서 발견된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초상 두상.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세밀하게 새긴 표현에서 로마 시대 초상 조각의 사실적인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Gavingaebe / Wikimedia Commons / CC0 1.0, (우)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1~3세기 유물 가운데 하나인 대리석 여성 두상. 섬세하게 다듬은 머리카락과 차분한 얼굴 표현에서 로마 시대 인물 조각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Yastay / Wikimedia Commons / CC BY 4.0

     

    왼쪽의 하드리아누스 황제 두상에서는 곱슬거리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세밀하게 표현한 조각 기술이 눈에 들어옵니다. 오른쪽 여성 두상 역시 머리카락과 얼굴선을 섬세하게 다듬어 인물의 분위기를 살렸습니다.

     

    그런데 고대 조각을 볼 때는 남아 있는 부분만큼 사라진 부분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팔과 다리가 없어지고 코가 깨졌으며 몸통이나 머리만 남은 작품도 적지 않습니다.

     

    고대인이 처음부터 이렇게 만들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지진과 건물 붕괴, 재사용과 약탈, 풍화와 매장, 그리고 발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간을 거치며 손상된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박물관에서 만나는 고대 조각에는 완성 당시의 예술성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작품이 2천 년 가까운 시간을 지나온 과정까지 표면에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병에서 주전자까지, 로마인은 유리로 무엇을 만들었을까?

    로마 시대 유리병과 주전자, 잔, 볼 등 다양한 형태의 고대 유리 용기
    로마 시대에는 유리로 병과 주전자, 잔, 볼 등 다양한 생활용기를 제작했다. 옅은 청록빛과 투명한 유리 표면에서 당시 발달한 유리 제작 기술을 엿볼 수 있다. ※ 프랑스 트리카스탱 고고학 박물관의 로마 유리 전시 사진을 참고해 AI로 재현

     

    대리석 조각이 로마 사회의 공적인 얼굴을 보여준다면, 유리 용기는 훨씬 사적인 일상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위 사진은 로마 시대 유리의 다양한 형태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 이미지입니다.

     

    로마인들은 유리로 목이 긴 병부터 손잡이가 달린 주전자, 잔과 작은 볼까지 다양한 생활용기를 만들었습니다. 지금은 유리컵 하나가 특별할 것이 없지만 고대에는 상당한 제작 기술이 필요한 물건이었습니다.

     

    특히 로마 시대에는 유리 불기 기술이 널리 확산되면서 뜨거운 유리를 부풀리고 늘려 얇은 벽과 좁은 목, 둥근 몸체를 가진 용기를 보다 다양하게 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형태가 다른 것은 용도 역시 달랐기 때문입니다. 음식과 음료를 담는 병과 잔이 있는가 하면 기름이나 향유, 화장품처럼 적은 양을 보관하기 위한 작은 용기도 만들어졌습니다. 손잡이와 주둥이의 모양까지 살펴보면 무엇을 담았는지뿐 아니라 어떻게 사용했는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 유리에서 자주 보이는 옅은 청색과 녹색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원료와 제작 조건에 따라 다양한 색조가 나타났고, 오랜 세월 땅속에 묻힌 유리는 표면이 흐려지거나 특유의 풍화 흔적을 남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작은 유리병은 단순히 예쁜 고대 그릇이 아닙니다. 형태와 크기, 제작법을 살펴보면 로마인의 식생활과 저장 방식, 향료와 몸단장 문화 같은 생활사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거대한 대리석 조각이 로마의 권력과 예술을 이야기한다면, 손바닥만 한 유리병은 그 시대 사람들이 매일 무엇을 담고 따르고 사용했는지를 들려줍니다. 박물관에서는 크기가 작은 유물이 오히려 생활을 더 가까이 보여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묘비의 이름을 읽는 순간, 역사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된 라틴어 비문과 장식이 새겨진 로마 시대 석비
    라틴어 비문에 실제 인물의 이름이 남아 있는 로마 시대 석비.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헤르마디온(Publius Clodius Hermadion)과 그의 아내 노벨리아 피아(Novellia Pia)의 이름을 통해 약 2천 년 전을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Adert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로마 시대 전시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물러도 좋은 유물이 비문이 새겨진 석비입니다. 조각상처럼 화려하지는 않지만 여기에는 실제로 살았던 사람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사진 속 라틴어 비문에서는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헤르마디온(Publius Clodius Hermadion)노벨리아 피아(Novellia Pia)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낯선 라틴어 문자가 갑자기 약 2천 년 전 한 사람과 가족의 흔적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도기는 사람들이 무엇을 사용했는지를 알려주고, 유리병은 무엇을 담았는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름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 사회 안에서 실제 사람들이 살고 사랑하고 죽었으며 누군가에게 기억되었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비문은 로마화의 과정도 생각하게 합니다. 로마식 도시와 행정, 언어와 생활문화가 확산됐다고 해서 지역의 모든 전통과 정체성이 하루아침에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제국의 문화와 기존의 지역사회는 오랜 시간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래서 석비 한 장은 황제의 역사보다 훨씬 조용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제국이라는 거대한 체제 안에서 평범한 사람들은 어떤 이름으로 살아갔고, 자신을 어떻게 기억하게 했을까요?

     

    빌리스의 비문을 읽으면 도시의 성벽이 보인다

    로마 시대를 지나 후기 고대로 넘어가면 빌리스(Byllis)의 성벽과 관련된 빅토리누스 비문도 흥미로운 자료가 됩니다.

     

    성벽은 단순히 도시 둘레에 돌을 쌓아 올린 시설이 아닙니다. 언제 방어시설을 만들거나 고쳤는지, 누가 그 사업을 지휘했는지를 알려주는 비문이 함께 남아 있다면 도시가 처했던 정치적·군사적 상황까지 추적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몇 줄의 글자가 새겨진 돌에 불과해 보입니다. 하지만 내용을 알고 나면 돌 한 장 뒤로 성벽과 성문, 그 안에서 살아가던 도시 사람들이 함께 떠오릅니다.

     

    고고학 박물관의 매력은 바로 이런 순간에 있습니다. 작은 유물 하나가 사라진 도시 전체를 상상할 수 있는 단서로 바뀌는 것입니다.

     

    5. 로마가 사라져도 사람들의 삶은 이어졌다

    마지막 전시실에서 만나는 코만 문화

    로마 시대가 끝나면 박물관의 이야기도 끝날 것 같지만 아직 마지막 전시실이 남아 있습니다. 후기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시간입니다.

     

    이곳에서는 특히 코만(Koman) 문화와 관련된 묘지 출토품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화려한 황제상 대신 사람들이 몸에 걸고 옷에 달았던 작은 장신구들이 다시 전면에 등장합니다.

     

    알바니아 코만에서 출토된 7~8세기 금속 토크 목걸이와 방울 장식
    코만에서 발견된 7~8세기 토크 장신구. 단단한 금속 고리에 작은 방울 장식을 매단 형태로, 초기 중세 코만 문화의 개인 장신구를 보여준다. 현재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Fanny Schertzer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사진 속 유물은 코만에서 발견된 7~8세기의 토크 장신구입니다. 단단한 금속 고리에 작은 장식이 매달려 있어 당시 사람들이 몸을 꾸미는 방식과 금속을 다루는 기술을 함께 보여줍니다.

     

    코만 문화권의 묘지에서는 이런 장신구를 비롯해 귀걸이와 피불라, 허리띠 장식과 목걸이 등 다양한 개인 물품이 발견됩니다. 죽은 사람과 함께 묻힌 물건은 당시의 복식과 장식 취향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장례문화까지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됩니다.

     

    알바니아 슈르다에서 출토된 7~8세기 다채로운 유리구슬 목걸이 알바니아 슈르다에서 출토된 7~8세기 다채로운 유리구슬 목걸이
    슈르다에서 발견된 7~8세기 유리구슬 목걸이. 파랑과 초록, 붉은색 등 다양한 색과 무늬의 구슬은 초기 중세 코만 문화권의 장신구 제작과 복식 문화를 보여준다. 현재 티라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Fanny Schertzer / Wikimedia Commons / CC BY-SA 3.0

     

    이번에는 슈르다에서 발견된 7~8세기의 유리구슬 목걸이를 보겠습니다. 파랑과 초록, 붉은색을 띠는 작은 구슬을 하나씩 이어 만든 모습이 놀랄 만큼 섬세합니다.

     

    첫 전시실의 작은 석기를 떠올려보면 재미있는 대비가 생깁니다. 수천 년 동안 도구의 재료와 제작기술, 종교와 정치체제는 크게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몸을 꾸미고 옷을 장식하며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시대는 달라도 일상의 욕구에는 익숙한 구석이 있습니다. 유리구슬 하나가 거대한 왕국의 역사를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을 우리와 조금 더 가까운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코만 문화에서 연속성을 읽을 때는 조금 신중해야 한다

    이 마지막 전시실에서는 조금 더 진지한 질문도 만나게 됩니다.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는 동안 이 지역의 사람과 문화는 얼마나 이어졌을까요?

     

    알바니아 고고학에서는 고대 일리리아 문화와 중세 사회 사이의 문화적 연속성이 오랫동안 중요한 연구 주제였습니다. 코만 문화 역시 이 논의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하지만 장신구의 형태나 매장 방식처럼 일부 고고학적 요소가 이어진다고 해서 고대의 한 집단과 훗날의 사람들을 곧바로 하나의 혈통으로 연결할 수는 없습니다. 오랜 시간 동안 사람의 이동과 혼합, 언어와 정치체제의 변화가 함께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계보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어떤 생활 방식과 기술이 이어졌고, 무엇이 새롭게 바뀌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입니다. 코만의 작은 장신구가 흥미로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전시실을 나오면 알바니아 지도가 다르게 보인다

    아드리아해 동쪽 발칸반도에 위치한 알바니아와 주변 국가를 보여주는 지도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해를 마주한 알바니아. 작은 국토 안에는 일리리아부터 그리스·로마·중세로 이어지는 발칸의 긴 역사가 겹겹이 남아 있다.

     

    이제 마지막 진열장을 지나 다시 현재의 티라나로 돌아와 보겠습니다.

     

    박물관에 들어오기 전에는 알바니아가 아드리아해와 이오니아해를 마주한 작은 발칸 국가로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전시실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지도에 전혀 다른 층위가 생깁니다.

     

    선사시대의 석기에서 시작해 청동 투구를 지나고, 아폴로니아의 도기와 로마 조각, 이름이 새겨진 석비와 중세의 장신구까지 만났습니다. 시대도 재료도 계속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 속에서 알바니아가 놓인 위치의 의미도 선명해집니다. 이곳은 그리스 세계와 발칸 내륙, 아드리아해 건너 이탈리아가 만나는 길목이었습니다. 사람과 물건이 이동했고, 기술과 이미지가 전해졌으며, 여러 정치권력과 문화가 차례로 이 땅을 지나갔습니다.

     

    그럼에도 전시실에 남은 사람들의 모습은 의외로 익숙합니다. 도구를 만들고 음식을 담을 그릇을 사용했으며, 몸을 꾸미고 좋은 물건을 교환하고 죽은 사람의 이름을 돌에 남겼습니다.

     

    그래서 알바니아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 가장 오래 기억되는 것은 반드시 가장 크거나 화려한 유물일 필요가 없습니다.

     

    첫 전시실의 작은 석기에서 시작한 인간의 흔적이 청동과 도기, 대리석과 유리, 비문과 중세 장신구로 모습을 바꾸며 이어지는 과정 자체가 이 박물관의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몇 개의 전시실을 걸었을 뿐인데 수천 년이 지나갔습니다.

     

    고고학 박물관에서 시간여행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다음 진열장으로 몇 걸음만 옮기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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