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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에 들어가면 왕관이나 거대한 황금 보물이 먼저 시선을 빼앗지는 않습니다. 대신 천 년 된 브로치와 작은 게임 말,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토르상이 기다립니다.

     

    그런데 이 작은 물건들을 차례로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가 의외로 커집니다. 북대서양의 빈 섬에 사람들이 정착하고, 토르를 믿던 사회가 기독교 세계로 들어가며, 외딴 섬이 중세 유럽과 연결되는 과정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곳에서는 가장 작은 유물이 때로 가장 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레이캬비크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외관 전경
    레이캬비크에 자리한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아이슬란드의 정착 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역사를 대표 유물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Szilas / Wikimedia Commons / Public Domain

     

    1. 아이슬란드의 역사는 배를 타고 온 사람들로부터 시작된다

    다른 박물관에서는 선사시대, 여기서는 9세기부터 이야기가 빨라진다

    유럽의 국립박물관에 들어가면 대개 아주 먼 선사시대부터 출발합니다. 돌도끼를 지나 청동기와 철기시대를 통과한 뒤에야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아이슬란드는 시작부터 다릅니다. 국립박물관의 상설전시 《Making of a Nation: Heritage and History in Iceland》이 본격적으로 펼쳐놓는 역사는 약 800~1000년의 초기 정착 시대입니다. 아이슬란드에 사람이 영구적으로 정착해 사회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가 유럽 대륙보다 훨씬 늦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Making of a Nation》 상설전시의 전통 복식과 생활 유물, 범선이 전시된 내부 공간 재현 이미지
    아이슬란드의 정착 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역사를 따라가는 《Making of a Nation: Heritage and History in Iceland》 상설전시. 전통 복식과 생활 유물, 범선 등 시대별 자료를 통해 아이슬란드 사회가 변화해 온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 공간을 재현했다.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공식 홈페이지 자료 참고

     

    9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유럽에서 사람들이 북대서양을 건너왔고, 그 과정에는 브리튼 제도와 연결된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이 가져온 것은 사람 몇 명과 배 한 척이 아니었습니다. 가축과 농기구, 옷과 장신구, 언어와 법, 신앙과 이야기까지 하나의 생활세계를 통째로 옮겨왔습니다.

     

    전시를 따라가다 보면 그래서 아이슬란드의 역사가 유난히 압축적으로 느껴집니다. 처음에는 정착민의 작은 생활용품이 등장하고, 조금만 더 걸으면 북유럽 신앙과 중세 교회 미술이 연이어 나타납니다. 한 전시실 안에서 몇 세기가 빠르게 지나갑니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Making of a Nation》 상설전시의 중세 유물과 목조 조각이 전시된 내부 공간 재현 이미지
    아이슬란드의 정착 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역사를 따라가는 《Making of a Nation: Heritage and History in Iceland》 상설전시 공간. 목조 유물과 생활용품 등 시대별 자료를 따라가며 아이슬란드의 역사와 문화가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공식 홈페이지 자료 참고

     

    지도를 떠올려보면 이 정착은 꽤 대담한 선택이었습니다. 북대서양을 건너 도착한 곳에는 이미 닦인 도시도 농경지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농장을 만들고 가축을 길렀으며, 해안과 바다에서 얻는 자원도 생활에 활용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첫 전시에서 던져볼 질문은 “바이킹이 어떤 칼을 들었을까?”보다 조금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낯선 섬에 도착해 무엇을 입고, 무엇으로 먹고살고, 쉬는 시간에는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입니다. 답은 뜻밖에도 아주 작은 물건들에서 나옵니다.

     

    황금보다 작은 브로치와 게임 말이 더 말이 많다

    먼저 눈여겨볼 것은 900~1000년경의 도금 청동 브로치입니다. 처음에는 장식이 예쁜 작은 금속품 정도로 보이지만, 당시 여성의 옷차림을 읽을 수 있는 생활 자료입니다. 이런 브로치는 겉옷을 어깨 앞에서 고정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소장 10세기 도금 청동 튜닉 브로치
    900~1000년경 아이슬란드 북부 흐리사르의 무덤에서 발견된 청동 여성용 튜닉 브로치. 당시 여성들은 이런 브로치를 한 쌍으로 착용해 양쪽 어깨 앞에서 겉옷을 고정했으며, 이 유물에는 천 년이 지난 지금도 도금 흔적이 상당 부분 남아 있다.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공식 자료 참고

     

    천 년 가까이 지났는데도 표면에는 도금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옛날에도 장신구를 좋아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옷감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금속 브로치는 남았습니다. 덕분에 사라진 옷의 형태까지 거꾸로 추적할 수 있습니다.

     

    박물관에서는 이렇게 남아 있는 물건으로 사라진 생활을 복원하는 순간이 자주 생깁니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는 조금 더 인간적인 물건이 등장합니다. 전쟁도 농사도 아닌, 놀이의 흔적입니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소장 900~1000년경 고래뼈로 만든 흐네파타플 게임 말
    아이슬란드 북부 미바튼의 발뒤르스헤이뮈르(Baldursheimur) 이교도 무덤에서 발견된 900~1000년경 흐네파타플(hnefatafl) 게임 말. 고래뼈로 만든 높이 약 4cm의 작은 인물상으로, 양손으로 긴 갈라진 수염을 잡고 있다. 게임에서 왕과 비슷한 중심 말인 ‘흐네피(hnefi)’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공식 자료 참고

     

    수염을 양손으로 붙잡고 앉아 있는 이 작은 인물은 흐네파타플(hnefatafl)이라는 북유럽 전략 게임의 말로 추정됩니다. 그중에서도 중앙에서 탈출해야 하는 왕 역할의 말, ‘흐네피(hnefi)’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게임의 기본 구도는 꽤 극적입니다. 한쪽은 왕이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도록 지키고, 반대편은 그 왕을 둘러싸 붙잡아야 합니다. 체스와 규칙은 다르지만, 상대의 수를 읽고 길을 막아야 하는 전략 게임이라는 점에서는 충분히 익숙하게 느껴집니다.

     

    바이킹 시대라고 하면 배와 도끼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사람들은 하루 종일 바다만 건너고 싸움만 한 것이 아닙니다. 긴 겨울밤 누군가는 보드 앞에 앉아 왕을 탈출시키려 머리를 굴렸을 것입니다. 이 작은 말 하나가 바이킹 시대 사람들을 갑자기 우리와 가까운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아이슬란드에서 발견된 바이킹 시대 흐네피 유물을 참고해 흐네파타플 보드게임의 경기 모습을 재현한 이미지
    흐네파타플(Hnefatafl) 게임 재현. 아이슬란드 발뒤르스헤이뮈르의 900~1000년경 무덤에서는 중앙의 왕 역할을 했던 ‘흐네피(Hnefi)’를 비롯한 게임 말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사진은 당시 보드게임의 모습을 이해하기 쉽도록 재구성한 이미지입니다.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Making of a Nation》 공식 전시 자료 참고

     

    게임판 모습까지 떠올려보면 아까의 수염 난 작은 인물이 왜 특별했는지도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니라 경기 전체가 돌아가는 중심 말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활 유물을 볼 때 한 가지 기억해둘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천 년 전 생활의 완전한 목록이 아닙니다. 금속이나 뼈처럼 잘 남는 재료와 무덤에 함께 묻힌 물건은 살아남기 쉽지만, 천과 나무로 만든 평범한 물건은 사라질 가능성이 훨씬 큽니다.

     

    박물관은 남아 있는 것만 보여주지만, 좋은 관람은 사라진 것까지 상상하게 합니다.

     

    생활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바다를 만나게 된다

    아이슬란드에서 바다는 단순한 풍경이 아니었습니다. 초기 사회의 중심에는 농장과 목축이 있었지만, 해안과 바다 역시 식량과 자원을 얻는 중요한 공간이었습니다.

     

    시간이 더 흐르면 바다의 역할은 커집니다. 중세 후기에 이르면 말린 생선, 특히 스톡피시(stockfish)가 중요한 교역품으로 성장합니다. 지금 아이슬란드 경제와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어업의 역사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여기서 연결됩니다.

     

    하지만 정착민들이 배에 실어온 것은 먹고사는 기술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다를 건넌 배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짐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배에 실어온 것은 물건만이 아니었다

    새로운 땅에 도착했다고 해서 이전 세계를 모두 내려놓는 것은 아닙니다. 정착민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관습, 이야기와 신앙을 아이슬란드로 가져왔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오딘과 토르를 비롯한 북유럽 신들의 세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의 흔적을 보여주는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의 가장 유명한 유물 가운데 하나가 다음 전시에서 기다립니다.

     

    다만 천둥을 일으키고 거인과 싸운다는 토르를 생각하고 너무 거대한 모습을 기대하지는 마세요. 실물은 놀랄 만큼 작고, 자세는 놀랄 만큼 얌전합니다.

     

    2. 작은 토르상이 보여주는 바이킹의 마지막 신앙

    천둥의 신을 찾았는데 높이가 6.7cm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소장 1000년경 에이라를란드 토르 청동상
    아이슬란드 북부 에이라를란드에서 발견된 약 1000년경의 토르(Þór) 청동상. 높이 6.7cm의 작은 조각으로, 천둥의 신 토르가 망치 묠니르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된다.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공식 자료 참고

     

    이 작은 청동상이 에이라르란드 토르상(Eyrarland Statue)입니다. 아이슬란드 북부 에이라르란드에서 발견되었으며 약 1000년경의 유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높이는 고작 6.7cm입니다. 사진만 크게 보다가 실물 크기를 알고 나면 “이게 그 유명한 토르라고?” 싶을 정도입니다. 자세도 의외입니다. 위협적인 전사의 모습이 아니라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물건 하나를 잡고 있습니다.

     

    박물관에서는 이 인물을 북유럽 신화의 토르(Þór)로, 손에 든 물건은 그의 망치 묠니르(Mjölnir)로 해석합니다. 망치처럼 보이는 부분이 얼굴의 수염과 이어진 듯한 독특한 형태라서 작은 조각인데도 한참 들여다보게 됩니다.

     

    토르는 단순히 힘만 센 신이 아니었습니다. 천둥과 힘을 상징하면서 인간 세계를 위협하는 존재에 맞서는 보호자의 성격도 강했습니다. 험한 바다를 건너 낯선 섬에서 삶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이런 신이 어떤 존재였을지 생각하면 6.7cm짜리 청동상이 갑자기 작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토르의 망치는 신화 속 무기에서 실제 장신구가 되었다

    토르상을 본 뒤에는 바로 다음 은제 장신구도 함께 보세요. 이번에는 인물 전체가 아니라 토르의 상징만 남았습니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소장 950~1050년경 은제 토르의 망치 펜던트
    아이슬란드 남부 포스(Foss)에서 발견된 토르의 망치(Þór’s Hammer). 950~1050년경 제작된 5×3cm 크기의 은제 장신구로, 고리를 연결해 목에 걸었던 펜던트로 추정된다.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공식 자료 참고

     

    아이슬란드 남부 포스에서 발견된 이 은제 펜던트는 약 950~1050년경의 것으로, 크기도 약 5 ×3cm에 불과합니다. 고리를 달아 목에 걸었던 장신구로 추정됩니다.

     

    이런 묠니르 펜던트가 흥미로운 이유는 신화가 일상 속 물건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토르가 어디선가 망치를 휘두르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그 망치 모양을 몸에 걸고 다니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신앙 표현입니다.

     

    그리고 연대를 보면 더 재미있어집니다. 토르상과 이 펜던트 모두 대략 서기 1000년 전후의 세계에 놓여 있습니다. 바로 아이슬란드가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던 시기와 겹칩니다.

     

    하필 서기 1000년경, 두 종교가 한 시대에 겹친다

    그래서 토르상을 단순히 “바이킹이 믿었던 신”으로만 보고 지나가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을 놓칩니다. 이 유물이 서 있는 곳은 한 종교가 완전히 끝난 뒤가 아니라 오래된 북유럽 신앙과 새로운 기독교가 맞닿던 경계입니다.

     

    종교가 공식적으로 바뀐다고 해서 어제 믿던 신이 오늘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법과 제도는 빠르게 바뀔 수 있어도 개인의 믿음과 관습은 더 천천히 움직입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유물에서는 “토르냐, 기독교냐”처럼 칼로 자르듯 시대를 나누기보다, 두 세계가 한동안 나란히 존재했을 가능성을 보는 편이 훨씬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몇 세기 뒤로 가면 변화는 더 이상 작지 않습니다. 토르상이 6.7cm였다면, 이제는 고개를 들어야 합니다. 높이 2m가 넘는 거대한 교회 문이 등장합니다.

     

     

    3. 한쪽은 사자, 한쪽은 용이 지키는 중세 교회의 문

    멀리서는 오래된 문, 가까이에서는 한 편의 모험담이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중세 목조 발쇼프스타뒤르 문
    아이슬란드 중세 목조 조각의 대표작 발쇼프스타뒤르 문(Valþjófsstaður Door). 둥근 문양 속에 기사와 사자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정교한 부조로 새겨져 있다. Jakub Hałun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에서 토르상과 함께 반드시 가까이 가서 볼 만한 유물이 발쇼프스타뒤르 문(Valþjófsstaður Door)입니다. 동부 아이슬란드의 발쇼프스타뒤르에서 사용되었던 소나무 문으로, 12세기 후반 무렵 만들어진 중세 목조 조각의 대표작입니다.

     

    높이는 약 206.5cm에 이릅니다. 바로 앞에서 본 토르상이 손바닥만 했다면 이번에는 사람보다 큰 유물이 나타나는 셈이지만, 진짜 재미는 크기가 아니라 표면에 있습니다.

     

    멀리서 보면 오래된 나무문입니다. 하지만 둥근 조각 부분을 가까이 보면 갑자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기사와 사자, 용이 등장하고 장면이 다음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중세 교회 문 한 짝이 일종의 그림책처럼 작동합니다.

    기사가 사자를 구했더니 사자가 끝까지 따라왔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발쇼프스타뒤르 문의 ‘사자의 기사’ 이야기가 새겨진 중세 목조 부조 재현 이미지
    발쇼프스타뒤르 문(Valþjófsstaður Door)에 새겨진 ‘사자의 기사’ 이야기. 기사가 사자를 구하는 장면과 사자가 기사를 따르는 모습, 마지막에는 기사의 무덤 곁에 엎드린 사자가 하나의 원형 부조 안에 이어진다. 중세 유럽의 기사 이야기가 아이슬란드까지 전해졌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흔적이다.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공식 홈페이지 자료 참고

     

    이야기는 꽤 드라마틱합니다. 기사가 용에게 위협받는 사자를 구하고, 살아남은 사자는 자신을 구해준 기사를 따라갑니다. 그런데 끝은 예상보다 쓸쓸합니다. 기사가 죽은 뒤에도 사자가 그의 무덤 곁에 남아 주인을 애도합니다.

     

    용과 싸우는 기사, 목숨을 구해준 영웅을 따르는 사자, 죽음 뒤에도 이어지는 충성. 약 800년 전 이 문을 조각한 장인이 선택한 장면인데, 이야기의 맛은 지금 보아도 꽤 익숙합니다. 영웅과 괴물, 충성과 비극이 한데 들어있으니 현대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이라 해도 크게 낯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문 앞에서는 종교미술이라는 말에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중세 사람들도 괴물과 영웅, 모험과 충성심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시대가 달라도 이야기에 끌리는 사람의 취향은 의외로 잘 변하지 않습니다.

     

     

    아이슬란드 발쇼프스타뒤르 문의 하단에 새겨진 네 마리 용의 원형 목조 부조 재현 이미지
    발쇼요프스타뒤르 문(Valþjófsstaður Door) 하단의 원형 부조. 네 마리 용이 서로 꼬리를 물고 복잡하게 얽혀 하나의 원형 문양을 이루며, 12세기 아이슬란드 목조 조각의 정교한 장식성을 보여준다.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공식 홈페이지 자료 참고

     

    아래쪽 원형 부조는 또 다릅니다. 이번에는 네 마리 용이 서로 몸과 꼬리를 얽어 하나의 복잡한 문양을 만듭니다. 이야기를 읽는 윗부분과 달리 아래에서는 선과 몸이 서로 꼬이면서 장식 자체가 중심이 됩니다.

     

    이렇게 전체 사진과 세부 사진을 번갈아 보면 왜 이 문이 아이슬란드 중세 목조 조각의 대표작으로 꼽히는지 이해하기 쉽습니다. 멀리에서는 하나의 문인데, 가까이에서는 여러 장면과 문양이 숨어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용보다 ‘이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발쇼프스타뒤르 문에서 더 흥미로운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유행하던 기사와 사자의 이야기가 어떻게 북대서양의 아이슬란드 교회 문에 새겨졌을까요?

     

    이 문은 아이슬란드가 ‘세상 끝의 고립된 섬’이었다는 이미지를 흔듭니다. 사람과 물건만 바다를 건넌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야기와 미술 양식, 종교문화도 함께 이동했습니다.

     

    조금 전에는 정착민들이 언어와 토르 신앙을 배에 싣고 왔다고 했습니다. 몇 세기가 지나자 이번에는 기독교와 중세 유럽의 기사 이야기가 같은 바다를 건너옵니다. 아이슬란드의 역사를 연결하는 것은 의외로 계속 ‘바다를 건너온 것들’입니다.

     

    이 문 자체도 훗날 다시 바다를 건넜습니다. 19세기 중반 아이슬란드를 떠나 코펜하겐으로 옮겨졌다가 1930년 아이슬란드로 돌아왔습니다. 이야기만 여행한 것이 아니라 유물도 여행한 것입니다.

     

    토르상과 발쇼프스타뒤르 문을 차례로 놓고 보면 변화는 더욱 선명합니다. 한쪽에서는 토르가 묠니르를 들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중세 기사가 용과 싸웁니다.

     

    불과 몇 세기 사이에 신앙이 달라졌고, 사람들이 소비하는 이야기가 달라졌으며, 아이슬란드가 연결되는 문화권도 훨씬 넓어졌습니다.

     

    그렇다면 토르를 믿던 사회는 실제로 어떻게 기독교 세계로 넘어갔을까요? 다음 구간에서는 그 변화가 더 이상 작은 장신구나 문양에 머물지 않습니다. 거대한 그리스도상과 교회 유물, 그리고 종교개혁을 거치며 아이슬란드 사회 전체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4. 바이킹의 신들이 사라진 뒤 아이슬란드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토르 다음에 등장하는 것은 높이 1m가 넘는 그리스도상이다

    토르상 앞에서 약 1000년이라는 연대를 확인했다면, 이제부터는 아이슬란드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달라집니다.

     

    아이슬란드는 서기 1000년 무렵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다고 어느 날 아침 사람들이 토르와 오딘을 모두 잊고 곧바로 새로운 신앙만 따랐다고 생각하면 너무 단순합니다.

     

    제도는 빠르게 바뀔 수 있어도 사람의 기억과 관습은 훨씬 천천히 움직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본 토르상과 묠니르 펜던트가 더 중요합니다. 옛 신앙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 새로운 종교가 이미 들어오고 있던 경계의 유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두 세기가 지나면 변화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북유럽 신들의 흔적이 줄어들고, 대신 교회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유물이 전시실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 전환을 눈앞에서 보여주는 유물 가운데 하나가 우프사크리스트(Upsakristur)입니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소장 12세기 우프사크리스트 목조 그리스도상 전시 재현 이미지
    1100~1200년경 제작된 우프사크리스트(Upsakristur) 그리스도상. 아이슬란드 북부 우프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공식 자료 참고

     

    1100~1200년경 제작된 이 목조 그리스도상은 높이가 1m가 넘습니다. 조금 전까지 손바닥만 한 토르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면 시선의 크기부터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 대비가 꽤 강렬합니다. 불과 한두 세기 전에는 작은 청동 토르상을 만들던 사회가 이제는 교회 안에 커다란 그리스도상을 세우고 있습니다. 종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연도보다 훨씬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기독교화는 단순히 믿는 신의 이름만 달라진 사건도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보는 이미지, 사용하는 물건, 건물을 꾸미는 방식까지 함께 바뀌었습니다. 신앙의 변화가 결국 시각문화 전체를 바꿔놓은 것입니다.

    교회가 커지자 박물관에 남는 물건도 화려해졌다

    중세 구역으로 들어갈수록 전시실이 갑자기 화려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중세 기독교 성상과 제의복·교회 미술품
    기독교가 정착한 뒤 아이슬란드 교회에 등장한 성상과 종교화, 조각 장식, 화려한 제의복 등을 한자리에 구성한 전시 재현 이미지. 교회의 성장과 함께 남겨진 유물의 종류와 장식도 한층 다양해졌음을 보여준다. AI 재현 / Isländisches Nationalmuseum(Klassenfahrt.eu) 전시 사진 참고

     

    중세의 교회는 예배만 보는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토지와 재산을 보유했고, 해외와 연결되었으며, 장인과 예술이 모이는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의 1400~1500년경 드라플라스타디르 성인 제단 전면 장식
    드라플라스타디르 제단 전면 장식(Altar frontal from Drafastaðir). 1400~1500년경 제작된 중세 아이슬란드 자수 작품으로, 아홉 개의 화면에 성모자와 여러 성인·사도들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양모와 캔버스를 사용했으며 중세 아이슬란드 교회 미술과 자수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공식 자료 참고

     

    그래서 교회에는 목조 성상과 제의복, 금속 공예품과 제단 장식처럼 값비싸고 정교한 물건이 모였습니다. 일부는 수백 년 동안 보존되었고, 오늘날 박물관 전시실을 채우는 대표 유물이 되었습니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성부를 표현한 중세 삼위일체 제단 성상
    성부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앞에 두고 있는 삼위일체 성상. 양쪽에 채색된 문이 달린 제단용 작품으로, 중세 아이슬란드 교회에서 사용된 종교미술의 화려한 색채와 장식을 보여준다. Jakub Hałun / Wikimedia Commons / CC BY-SA 4.0

     

    삼위일체 성상처럼 채색과 조각이 결합된 작품을 보면 당시 교회가 얼마나 강한 시각적 공간이었는지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박물관 조명 아래 조용히 놓여 있지만 원래는 예배와 의례가 이루어지는 공간에서 신앙을 눈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박물관 관람의 작은 함정 하나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유물이 화려하다고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 전체가 화려했던 것은 아닙니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기독교화 이후 중세 교회 성상과 제의복·종교 유물 전시 재현 이미지
    기독교가 정착하면서 아이슬란드의 교회에 남기 시작한 성상과 제의복, 교회 장식품을 함께 보여주는 전시 재현 이미지. 신앙의 변화가 당시 미술과 생활문화에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 살펴볼 수 있다. AI 재현 / Isländisches Nationalmuseum(Klassenfahrt.eu) 전시 사진 참고

     

    평범한 옷은 닳아 없어지고, 나무 생활도구는 썩기 쉽습니다. 반면 교회가 소유한 귀한 성상과 금속품, 제의복은 상대적으로 보존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래서 중세 전시를 볼 때는 진열장을 당시 사회의 평균적인 거실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왜 이 물건은 살아남았을까?”라고 묻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박물관은 남은 물건으로 역사를 보여주지만, 관람객은 남지 않은 것까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기독교 안에서 다시 충돌이 시작된다

    그렇게 기독교가 자리 잡았다고 해서 종교사가 평온하게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16세기가 되면 또 한 번 큰 변화가 찾아옵니다.

     

    유럽을 뒤흔든 종교개혁이 아이슬란드까지 들어온 것입니다. 덴마크 왕권은 루터교를 도입하려 했고, 아이슬란드에서는 이에 대한 저항이 이어졌습니다.

     

    그 갈등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인물이 홀라르(Hólar)의 가톨릭 주교 욘 아라손(Jón Arason)입니다. 그는 종교개혁에 맞서 저항하다 1550년 두 아들과 함께 처형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이슬란드 중세의 끝을 상징하는 장면 가운데 하나로 여겨집니다. 조금 전까지는 토르가 사라지고 기독교가 들어오는 모습을 봤는데, 몇 세기 뒤에는 같은 기독교 안에서 가톨릭과 루터교가 다시 충돌합니다.

     

    역사는 종교 하나가 다른 종교를 대신하고 끝나는 깔끔한 교대식이 아니었습니다. 한 시대가 끝날 때마다 새로운 갈등과 새로운 문화가 함께 들어왔습니다.

    1584년 성경 한 권이 종교보다 더 많은 것을 바꿨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소장 1584년 구드브란두르 성경
    구드브란두르 성경(Guðbrandsbiblía)은 1584년 홀라르에서 인쇄된 최초의 아이슬란드어 완역 성경이다. 약 500부가 제작되었으며, 아이슬란드의 종교개혁뿐 아니라 아이슬란드어와 인쇄문화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유물로 꼽힌다.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공식 자료 참고

     

    종교개혁 이후 꼭 눈여겨볼 유물이 구드브란두르 성경(Guðbrandsbiblía)입니다. 1584년 홀라르에서 인쇄된 최초의 아이슬란드어 완역 성경입니다.

     

    지금 보면 오래된 성경 한 권처럼 보일 수 있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프로젝트였습니다. 약 500부를 찍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아이슬란드처럼 인구가 적고 인쇄 기반도 제한적이었던 사회에서 자국어로 완역 성경을 제작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종교만 바꾼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교회에서 사용할 책들이 아이슬란드어로 인쇄되면서 아이슬란드어가 예배와 읽기의 언어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기반도 함께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이 성경은 종교 유물이면서 동시에 언어 유물입니다.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훗날 자신들의 언어와 정체성을 강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을 생각할 때도 빠뜨리기 어려운 물건입니다.

     

    토르상에서는 신앙이 바뀌는 순간을 보았다면, 구드브란두르 성경에서는 새로운 종교가 오히려 오래된 언어를 지키는 도구가 되는 역설을 만나게 됩니다.

     

    5. 작은 정착촌은 어떻게 오늘의 아이슬란드가 되었을까?

    1600년을 지나면 신보다 사람의 생활이 앞으로 나온다

    1600년을 넘어서면 전시의 분위기가 다시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교회 문과 성상, 성경이 중심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생활용품과 개인 물건이 훨씬 자주 등장합니다.

     

    그 첫머리에서 만나는 유물부터 꽤 독특합니다. 1598년에 만들어진 카나의 술잔 뿔(Cana drinking horn)입니다.

     

    1598년 브리뇰뷔르 욘손이 성서 장면을 조각한 카나의 술잔 뿔
    《카나의 술잔 뿔(Cana drinking horn)》, 1598년. 소뿔 표면에 카나의 혼인잔치와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압살롬 이야기 등 성서 장면을 촘촘하게 새겼다. 16세기 말 아이슬란드의 뛰어난 목축 문화와 조각 기술을 함께 보여주는 유물이다.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공식 홈페이지 자료 참고

     

    소뿔 표면을 자세히 보면 카나의 혼인잔치를 비롯한 성서 이야기가 촘촘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기독교 세계가 여전히 생활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증거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범한 재료를 정교한 공예품으로 바꾸는 당시 장인의 솜씨를 보여줍니다.

     

    성경의 이야기를 책에서만 읽은 것이 아니라 술잔 표면에도 새겼다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종교가 교회 벽 안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생활용품의 장식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조금 더 걸으면 이번에는 훨씬 실용적인 물건이 등장합니다. 날짜를 기억하기 위한 도구입니다.

     

     

    1615년 제작된 아이슬란드 전통 달력 림탈(Rímtal), 양피지 두루마리와 장식된 구리 합금 원통
    《림탈(Rímtal)》, 1615년. 여러 해의 날짜를 기록한 아이슬란드식 달력으로, 글씨를 적은 긴 양피지를 장식된 구리 합금 원통에 감아 보관하도록 만들었다. 양피지에는 1615년이라는 연도와 스노리 욘손(Snorri Jónsson)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공식 홈페이지 자료 참고

     

    1615년의 림탈(Rímtal)은 여러 해의 날짜를 기록한 아이슬란드식 달력입니다. 긴 양피지를 원통에 감아 보관하는 방식이라 오늘날 달력과 생김새부터 전혀 다릅니다.

     

    이런 물건을 보면 역사는 갑자기 생활 가까이 내려옵니다. 사람들은 성경과 성상만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언제가 어느 날인지, 절기와 날짜를 어떻게 계산할지도 중요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실용적인 물건들 사이에 설명하기 꽤 어려운 유물이 하나 끼어 있습니다.

     

     

    17세기 아이슬란드 스토라보르그에서 발견된 거칠게 깎은 목제 가면과 유물 설명
    《스토라보르그의 가면(Mask from Stóra-Borg)》, 1600~1700년경. 남부 아이슬란드 스토라보르그에서 발견된 목제 가면으로, 정확한 용도는 밝혀지지 않았다. 유령이나 환상적인 존재를 표현하는 이야기·공연에 사용했거나 어린이 장난감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National Museum of Iceland) 공식 홈페이지 자료 참고

     

    스토라보르그의 목제 가면입니다. 17세기 무렵의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히 무엇에 사용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나 공연에서 유령 같은 존재를 표현했을 가능성도 있고, 어린이 장난감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박물관의 모든 유물이 깔끔하게 해석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물건이 재미있습니다. “이건 대체 무엇에 썼을까?”라는 질문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답을 알고 보는 유물도 좋지만, 정답이 없는 유물 앞에서는 관람객도 잠시 연구자가 됩니다.

     

    화려한 전통복은 오히려 ‘남지 않은 옷’을 생각하게 한다

    근세 생활문화에서 가장 눈에 잘 들어오는 것은 역시 의복입니다. 특히 화려한 여성복은 전시실에서도 강한 인상을 남깁니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팔드뷔닝귀르 전통 여성복
    팔드뷔닝귀르(faldbúningur). 17세기 이후 아이슬란드 여성들이 착용했던 전통 복식 양식으로, 화려한 자수와 금속 장식, 독특한 머리장식에서 당시 생활문화와 복식의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사진은 국립박물관 전시 자료를 참고해 재현했다. AI 재현 /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 전시·Curious Wendy 촬영 자료 참고

     

    사진의 팔드뷔닝귀르(faldbúningur) 계열 전통복에서는 자수와 금속 장식, 독특한 머리장식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이 화려함을 당시 아이슬란드 여성 대부분의 일상복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값비싼 옷은 대대로 보관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평범한 작업복과 일상복은 닳아 없어졌습니다. 남성복 역시 오래된 사례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그래서 이런 의상을 볼 때는 “옛날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이렇게 화려하게 입었구나”보다 “왜 이런 옷만 살아남았을까?”라고 생각하는 편이 더 재미있습니다.

     

    앞서 브로치에서 옷감이 사라진 자리를 상상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박물관에 없는 평범한 옷을 함께 떠올려야 당시의 생활이 조금 더 균형 있게 보입니다.

     

    1703년 숫자 하나를 보면 나라의 크기가 갑자기 실감 난다

    17~18세기의 아이슬란드를 이해하는 데 화려한 유물보다 더 강력한 자료가 하나 있습니다. 1703년 인구조사입니다.

     

    당시 기록된 아이슬란드 인구는 약 5만 명이었습니다. 오늘날 도시 하나보다도 작은 규모입니다.

     

    게다가 사회의 대부분은 농업과 농장 노동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레이캬비크의 카페와 디자인 숍, 관광산업을 떠올리면 정말 같은 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여기에 덴마크의 무역 통제, 혹독한 기후, 화산 활동 같은 조건도 겹쳤습니다. 아이슬란드가 유럽 대륙과 같은 속도로 근대화하지 못한 이유를 단순히 “외딴섬이라서”라고만 설명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19세기가 되자 질문이 ‘어떻게 살까’에서 ‘우리는 누구인가’로 바뀐다

    1800년대로 들어서면 전시가 또 한 번 달라집니다. 이제 사람들은 생존과 신앙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덴마크 왕국의 변방인가, 아니면 독자적인 민족인가?”라는 질문이 힘을 얻기 시작합니다.

     

    1800년에 폐지되었던 알싱기(Alþingi)는 1845년 레이캬비크에서 다시 열렸고, 1874년에는 아이슬란드에 헌법이 부여됩니다.

     

    경제의 모습도 달라집니다. 범선을 이용한 어업과 상업 활동이 성장하고, 사람들은 점차 농촌을 떠나 해안과 도시로 이동합니다.

     

    여기서 첫 전시실의 바다 이야기가 다시 돌아옵니다. 초기에 바다는 먹고살기 위한 공간이었다면, 근대로 갈수록 나라의 경제를 움직이는 산업의 공간이 됩니다. 같은 바다가 시대에 따라 전혀 다른 역할을 맡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944년, 배를 타고 온 공동체가 하나의 공화국이 된다

    오랜 정치적 변화 끝에 아이슬란드는 1944년 6월 17일 공화국을 수립합니다.

     

    이 지점까지 오면 처음 전시실의 작은 브로치와 게임 말이 꽤 멀게 느껴집니다.

     

    9세기에는 사람들이 배에 가축과 생활도구를 싣고 북대서양을 건너왔습니다. 토르를 믿었고, 몇 세기 뒤에는 교회 문에 기사와 용을 새겼습니다. 다시 종교개혁을 지나 아이슬란드어 성경을 인쇄했고, 근대로 접어들면서 자신들의 의회와 헌법, 국가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슬란드 국립박물관의 진짜 주인공은 특정 유물 하나가 아니라 이 긴 변화 자체입니다.

     

    토르상만 보고 나오면 가장 재미있는 절반을 놓친다

    처음 방문하면 아무래도 바이킹과 토르상에 먼저 마음이 갑니다. 충분히 그럴 만합니다. 실제로 초기 정착 시대 유물과 에이라르란드 토르상은 이 박물관을 대표하는 강력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끝까지 걸어본 뒤에는 생각이 조금 달라집니다. 바이킹은 이 이야기의 결론이 아니라 시작에 가깝습니다.

     

    처음 방문한다면 초기 정착 시대의 생활 유물 → 흐네파타플 게임 말 → 에이라르란드 토르상과 묠니르 펜던트 → 발쇼프스타뒤르 문 → 우프사크리스트와 중세 교회 미술 → 구드브란두르 성경 → 근세 생활문화 → 독립 순서로 중심 유물을 잡아보세요.

     

    모든 진열장을 빠짐없이 읽지 않아도 이 흐름만 놓치지 않으면 약 1,200년에 걸친 아이슬란드 역사가 한 편의 긴 이야기처럼 이어집니다.

     

    박물관을 나설 때는 아이슬란드가 조금 다르게 보일 겁니다. 화산과 빙하 사이에서 사람들이 버텨온 나라라는 이미지에 더해, 바다 건너 들어온 문화와 신앙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언어와 정체성을 오래 지켜온 사회라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손바닥만 한 토르상에서 시작한 관람이 어느새 한 나라의 탄생까지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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