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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 케르마의 검고 붉은 토기와 이집트가 남긴 신전, 그리고 마침내 이집트의 파라오가 된 쿠시 왕 타하르카까지 따라왔습니다.
하지만 쿠시의 이야기는 제25왕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왕국은 훨씬 더 독특한 얼굴을 갖기 시작합니다.
사막에 촘촘히 솟은 피라미드, 강력한 왕실 여성들, 황금 장신구와 사자 머리의 신,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문자. 그리고 마지막에는 뜻밖에도 성모와 천사가 그려진 중세 성당의 벽화가 기다립니다.
수단 국립박물관 2부에서는 메로에 왕국에서 출발해 파라스 대성당까지, 누비아 문명이 다시 한번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1. 사막에 솟은 피라미드, 메로에 왕국의 새로운 중심
쿠시 왕국의 무대가 더 남쪽으로 이동하다
나파타 시대를 지나면 쿠시 왕국의 중심은 점차 남쪽으로 이동합니다. 이제 만나게 될 곳은 메로에(Meroë)입니다.
나일강과 아트바라강 사이에 자리한 메로에는 후기 쿠시 왕국의 중요한 정치·왕실 중심지였습니다.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왕실 매장이 본격적으로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도시 주변에는 오늘날 수단을 상징하는 풍경 가운데 하나인 거대한 왕실 피라미드 묘역이 형성되었습니다.

멀리서 보면 작은 삼각형들이 모래 위에 촘촘하게 솟아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하나가 왕과 왕비의 무덤입니다.
기자의 피라미드와 비교하면 규모는 작지만 경사는 훨씬 가파릅니다. 피라미드 정면에는 제사를 위한 작은 예배당이 붙어 있어 왕실 장례 의식이 이루어졌던 공간까지 함께 볼 수 있습니다.
메로에 피라미드가 인상적인 이유는 단순히 모양이 독특해서가 아닙니다. 수백 년에 걸쳐 왕실 묘역이 이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쿠시 왕권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피라미드 아래에서는 완전히 다른 쿠시가 보인다


왕실 무덤에서 나온 장신구와 도기, 조각을 보기 시작하면 나파타 시대의 쿠시와는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바로 느껴집니다.
이집트의 종교와 왕권 상징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형태와 색채, 장식에는 메로에만의 취향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아프리카 내륙과 이집트, 지중해 세계에서 들어온 요소들이 한 왕국 안에서 다시 조합되기 시작합니다.

메로에가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외부 문화의 영향을 받아들이면서도 그대로 복제하지 않았습니다. 그 요소를 자신들의 미감과 종교, 정치 속에서 다시 조립했습니다.
2. 칸다케와 황금 보물, 강력했던 메로에 왕실
메로에의 왕비는 왕의 뒤에 서 있지 않았다

메로에 시대에서 반드시 만나야 할 인물은 왕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왕실 여성들이 훨씬 강한 인상을 남기기도 합니다.
쿠시 왕실 여성을 이야기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칸다케(Kandake)입니다. 특정한 여성 한 사람의 이름이라기보다 왕실 여성에게 사용된 칭호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나카의 아페데마크 신전 탑문을 보면 그 권위가 매우 직접적으로 표현됩니다. 왕 나타카마니와 아마니토레가 같은 크기로 등장하고, 양쪽에서 각각 적을 붙잡아 제압합니다.
왕 뒤에 작게 서 있는 왕비의 모습이 아닙니다. 왕권의 행위를 직접 수행하는 통치자의 모습입니다.
로마와 전쟁한 아마니레나스
메로에의 강력한 왕실 여성 가운데 특히 기억할 이름이 아마니레나스(Amanirenas)입니다.
기원전 1세기 말, 로마가 이집트를 장악한 뒤 쿠시와 로마는 직접 충돌합니다. 쿠시군은 로마령 이집트 남부까지 진격했고 이후 로마군의 반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쿠시 왕국의 정복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양측은 협상했고 국경 관계가 다시 정리됩니다.
이 사건 하나만으로도 메로에를 이집트와 아프리카 사이의 작은 완충지대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당시 쿠시는 로마 제국과 직접 전쟁하고 협상할 수 있었던 독립적인 정치 세력이었습니다.

하마다브 석비에는 실제로 아마니레나스와 아키니다드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문제는 글자를 읽을 수 있어도 전체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비문이 로마와의 전쟁을 쿠시의 시선으로 기록한 것일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만약 언젠가 문장의 의미가 더 명확하게 밝혀진다면, 로마 역사서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이 전쟁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왕실의 권력은 손가락만 한 금속에도 새겨졌다

피라미드처럼 거대한 왕권의 상징을 보았다면 이번에는 아주 작은 유물 가까이로 다가가 보겠습니다.
메로에 왕실 묘역에서는 금제 목걸이와 팔찌, 펜던트, 부적과 반지가 발견되었습니다. 크기는 작지만 표면을 보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마니샤케토의 인장 반지를 확대하면 작은 금속 표면에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손가락 하나에 올라갈 정도의 작은 물건에도 왕실의 종교와 권위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익숙한 신과 보호 상징도 남아 있지만 사자와 숫양, 태양 원반과 여러 동물이 새로운 방식으로 조합됩니다. 메로에의 장신구는 외부의 재료와 도상을 가져와 자신들의 왕실 미술로 바꾸어낸 과정을 작은 크기 안에 압축해 보여줍니다.
금만 보면 메로에의 화려함을 절반밖에 못 본다

메로에 왕실의 화려함을 금으로만 설명하면 절반밖에 보지 못합니다. 유리와 파이앙스, 채색 토기처럼 다양한 재료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재료가 다양하다는 사실은 교역의 범위가 넓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메로에는 아프리카 내륙과 이집트, 지중해 세계가 만나는 교류망 속에 있었습니다.

케르마 토기의 매력이 검은색과 붉은색의 절제된 대비였다면 메로에 토기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화려합니다.
밝은 바탕 위에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새와 식물, 동물과 기하학 문양을 그립니다. 그릇의 둥근 몸체를 따라 그림이 이어지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정면만 보지 말고 한 바퀴 돌려 보고 싶은 유물입니다.
3. 사자신 아페데마크와 아직 풀리지 않은 메로에 문자
사자의 얼굴을 한 신이 나타나면 이제 정말 메로에다

이제 신의 얼굴을 살펴보겠습니다. 사자 머리를 한 신이 나타난다면 이름 하나를 기억해둘 만합니다.
아페데마크(Apedemak).

아페데마크는 왕권과 힘, 전쟁과 관련된 메로에의 중요한 신입니다. 아문과 이시스 같은 오래된 신들이 계속 숭배되는 가운데 쿠시 세계에서 특히 두드러지는 새로운 신격이 등장한 것입니다.

나카에서는 아페데마크가 더욱 독특한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 정도가 되면 메로에 문화를 단순히 이집트의 영향 아래 놓인 지방 문화라고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익숙한 미술의 문법을 사용하지만 등장하는 신과 왕, 상징은 분명히 새로운 세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글자는 읽는데 문장은 아직 침묵하고 있다

메로에의 독자성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는 메로에 문자입니다.

메로에 문자는 완전히 읽을 수 없는 문자가 아닙니다. 글자 기호의 음가와 읽는 방법은 상당 부분 밝혀졌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데 문장의 뜻을 충분히 해석하지 못합니다.
왕과 왕비의 이름과 일부 반복되는 단어는 이해하지만 긴 문장의 의미와 문법은 여전히 많은 부분이 남아 있습니다. 메로에와 가까운 언어가 명확하지 않고 결정적인 긴 이중언어 비문도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수천 년 전에 누군가가 돌 위에 문장을 또렷하게 남겼습니다. 우리는 그 문자를 눈앞에서 읽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메로에 문자 앞에서는 고대가 잠시 아주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집니다.
왕국을 움직인 것은 황금만이 아니라 철이었다

황금 장신구 뒤에는 또 다른 메로에가 있습니다. 유적에서는 철 제련과 관련된 대규모 슬래그와 생산시설의 흔적이 확인됩니다.

피라미드와 왕관만 보면 고대 왕국의 역사가 왕과 왕비 이야기로 끝나기 쉽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도시를 유지한 것은 농업과 물 관리, 도공과 금속 장인, 교역상과 수많은 노동자였습니다.
메로에에서는 왕의 무덤과 신전뿐 아니라 도시와 작업장, 생산시설의 흔적까지 함께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한 왕국의 정치와 종교, 기술과 경제를 하나의 풍경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4. 피라미드 다음에 성당이 나타나다
쿠시가 사라진 뒤에도 누비아의 역사는 끝나지 않았다
메로에 왕국이 쇠퇴했다고 해서 누비아의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수단 국립박물관에서는 여기에서 또 한 번 예상 밖의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피라미드와 사자신을 지나자 십자가와 성모 마리아, 천사와 주교가 등장합니다. 6세기 무렵 이후 중세 누비아에서는 노바디아(Nobadia), 마쿠리아(Makuria), 알로디아(Alodia)와 같은 기독교 왕국들이 성장했습니다.

나일강을 따라 성당과 수도원이 세워졌고 그 벽에는 그리스도와 성모, 천사와 성인뿐 아니라 누비아의 왕과 주교도 등장했습니다. 선사시대 토기로 시작한 박물관 전시가 중세 기독교 회화까지 이어진다는 사실만으로도 누비아 역사의 시간적 폭이 얼마나 긴지 실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르샤바에서 만났던 파라스가 다시 등장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번 수단 국립박물관 이야기를 시작하게 만든 장소와 다시 만납니다.
파라스(Faras).
고대에는 파코라스로 불렸던 이 도시는 중세 누비아 북부의 중요한 종교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대성당에서 발견된 벽화들은 오늘날 기독교 누비아 미술을 대표하는 작품군으로 평가됩니다.


1960년대 초 폴란드 조사단이 구조 발굴을 진행하면서 모래 아래에 묻혀 있던 대성당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가장 놀라운 발견은 성당 벽에 남아 있던 대규모 회화였습니다. 여러 시대에 걸쳐 그려진 100점이 넘는 벽화가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성당 자체를 옮길 수는 없었습니다. 댐이 완성되면 유적이 물에 잠길 예정이었기 때문입니다.
보존 전문가들은 110점이 넘는 벽화를 벽에서 떼어냈고, 발굴 유물과 벽화 일부는 당시의 분배 방식에 따라 수단과 폴란드에 나뉘어 보존되었습니다.
5. 파라스 대성당, 바르샤바와 하르툼을 잇는 벽화
성모와 천사의 얼굴에도 누비아의 시간이 남아 있다

파라스 벽화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오래된 기독교 그림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성모와 그리스도, 천사와 성인이 등장하는 장면 자체는 동방 기독교 미술에서 익숙합니다. 그러나 그 옆에는 누비아의 왕과 주교들이 자연스럽게 함께 등장합니다.


이런 그림은 종교화이면서 동시에 역사 기록입니다. 누가 누구의 보호를 받는지, 어떤 옷을 입었는지, 인물의 크기를 어떻게 달리 표현했는지를 보면 당시 사회의 권위와 신앙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성 베드로의 손 하나가 주교의 권위를 설명한다

페트로스 주교의 벽화는 파라스 회화를 읽는 방법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성 베드로는 주교보다 훨씬 크게 그려졌고 뒤에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립니다.
오늘날에는 다정한 보호의 장면처럼 보이지만 당시 신자에게는 훨씬 분명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주교의 권위가 성인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림 한 장으로 전달한 것입니다.
파라스에서는 벽화뿐 아니라 묘비와 비문, 석조 건축 장식, 도기와 여러 종교 유물이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은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 몇 점을 남긴 성당이 아니라 중세 누비아의 사회와 종교를 복원할 수 있는 거대한 고고학 자료입니다.
모래가 지켜낸 벽화를 물이 오기 전에 구해야 했다

천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는데도 일부 파라스 벽화에는 붉은색과 황토색, 흰색과 짙은 윤곽선이 놀라울 정도로 남아 있습니다. 성당이 폐허가 된 뒤 쌓인 모래와 건축 잔해가 역설적으로 그림을 보호했습니다.

하지만 발견한 뒤에는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물이 차오르기 전에 보존 전문가들은 벽화 표면을 보강하고 회벽째 잘라내 새로운 지지대에 옮겨야 했습니다.
오늘날 박물관 벽에서 보는 파라스의 그림들은 단순히 고고학자가 발견한 작품이 아닙니다. 사라질 예정이던 건축물의 벽에서 실제로 떼어내 살아남은 문화유산입니다.
바르샤바와 하르툼을 연결하면 성당이 다시 완성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번 박물관 여행이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옵니다. 바르샤바 국립박물관 파라스 갤러리의 벽화와 수단 국립박물관의 파라스 벽화는 원래 서로 다른 공간을 위해 제작된 작품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도시, 같은 대성당의 벽을 장식했던 그림들입니다. 오늘날에는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두 박물관에 나뉘어 있지만 출발점은 하나였습니다. 바르샤바에서 한 작품을 보고 하르툼에서 다른 작품을 만나는 순간, 오래전에 사라진 파라스 대성당의 벽이 머릿속에서 조금씩 다시 이어집니다.
그래서 이 글의 시작이 바르샤바였고 마지막이 다시 바르샤바와 연결된다는 점도 우연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한 박물관에서 수천 년의 누비아를 걸었다
이제 1부의 첫 장면을 잠시 떠올려보겠습니다. 작은 선사시대 토기에서 시작해 케르마의 검고 붉은 그릇을 보았고, 이집트 파라오가 세운 신전을 지나 쿠시의 왕들이 오히려 이집트의 왕관을 쓰는 순간까지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2부에서는 메로에의 피라미드와 강력한 왕실 여성, 황금 장신구와 사자신, 아직 완전히 뜻을 풀지 못한 문자를 만났습니다.
마지막에는 왕관과 피라미드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성당의 벽은 성모와 천사, 누비아의 왕과 주교가 채웠습니다.
수단 국립박물관이 특별한 이유는 유명한 유물 몇 점을 모아놓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곳의 유물들은 누비아가 수천 년 동안 외부 세계와 만나면서도 매번 자신들의 방식으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집트와 싸웠고, 이집트를 통치했으며, 로마와 전쟁했고, 마침내 자신들만의 기독교 왕국과 미술까지 발전시켰습니다. 바르샤바의 한 전시실에서 시작한 여행은 그렇게 나일강을 따라 수단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수단 국립박물관의 마지막 전시실을 나서는 순간 가장 오래 남는 것은 아마 유물의 숫자가 아닐 것입니다.
이렇게 거대한 문명을 왜 지금까지 이렇게 조금 알고 있었을까.
그 질문 하나가 남는다면 이번 두 편의 누비아 여행은 충분히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