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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의 남쪽에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오래된 세계가 있었습니다.
나일강을 따라 오늘날의 수단으로 내려가면 선사시대의 정교한 토기에서 케르마 왕국, 거대한 왕묘와 이집트 신전, 그리고 마침내 이집트의 파라오가 된 누비아의 왕들을 만나게 됩니다.
하르툼의 수단 국립박물관(Sudan National Museum)은 바로 이 긴 역사를 한 공간에서 보여주는 곳입니다. 이번 1부에서는 누비아 문명의 시작에서 출발해 케르마를 지나 제25왕조의 대표적인 쿠시 왕 타하르카까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1. 나일강 남쪽에서 시작된 또 하나의 문명
누비아를 이집트의 변방으로만 보면 놓치는 것이 많다
누비아를 처음 접할 때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생각이 있습니다. 이 지역을 단순히 고대 이집트의 남쪽 변방으로 바라보는 시선입니다.
나일강은 이집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넓은 사막과 급류가 이어지고, 그 사이로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비옥한 땅이 나타납니다. 오늘날 수단 북부와 이집트 남부에 걸친 이 지역에서 수천 년 동안 여러 문화와 왕국이 성장했습니다.
지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북쪽으로는 이집트, 남쪽으로는 아프리카 내륙, 동쪽으로는 홍해와 이어졌습니다. 금과 상아, 목재와 여러 귀중품이 오갔고 사람과 기술, 종교도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래서 수단 국립박물관을 걷다 보면 어느 한쪽 문화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유물이 계속 등장합니다. 이집트적인 형식이 나타났다가 누비아의 전통과 만나고, 몇 세기가 지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합니다.
왕의 이름보다 먼저 남은 것은 토기의 무늬였다

전시장에서는 먼저 작은 토기 앞에서 잠시 멈춰보는 것이 좋습니다. 앞으로 거대한 왕상과 신전이 기다리고 있지만 누비아 문명의 시작을 이해하는 데에는 오히려 이런 그릇이 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선사시대 누비아 토기에는 점과 선, 빗살무늬와 기하학 문양이 반복됩니다. 문자가 남아 있지 않은 시대에는 이런 무늬와 제작 방식이 하나의 기록입니다.
어떤 흙을 골랐는지, 표면을 어떻게 다듬었는지, 사람들이 어떤 형태를 아름답다고 생각했는지까지 그릇 속에 남아 있습니다. 왕의 이름이 기록되기 훨씬 전부터 누비아 사람들은 흙 위에 자신들의 감각을 남기고 있었습니다.
2. 검고 붉은 토기가 들려주는 케르마 왕국
누비아 최초의 강력한 왕국이 모습을 드러내다

이제 수단 고고학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 등장합니다. 케르마(Kerma)입니다.
나일강 제3급류 부근에 자리한 케르마는 기원전 약 2500년부터 1500년까지 번성한 초기 쿠시 왕국의 중심지였습니다. 도시에는 거대한 진흙벽돌 건축물인 데푸파가 솟아 있었고 주변에는 궁전과 종교 공간, 주거지, 작업장과 광대한 묘지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런데 거대한 건축물보다 관람객의 눈을 먼저 붙잡는 것은 의외로 작은 그릇입니다.

케르마 도기는 놀라울 정도로 얇고 매끈합니다. 붉게 연마한 몸체와 깊은 검은색의 윗부분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잘 만들어진 비커의 표면에는 은은한 광택이 살아 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런 정교한 그릇을 물레에 의존하지 않고 손으로 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검은색과 붉은색을 또렷하게 나누려면 소성 과정에서 온도와 산소 공급을 세심하게 조절해야 했습니다.
금이나 보석이 없어도 충분히 호화롭습니다. 케르마 문명을 대표하는 유물로 이 검고 붉은 그릇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왕의 힘은 거대한 무덤에서 드러났다

도시가 성장하면서 죽음의 풍경도 달라졌습니다. 케르마 동쪽에는 거대한 네크로폴리스가 형성되었고 왕권이 강해질수록 지배층의 봉분묘도 커졌습니다.

무덤 안에는 토기와 장신구, 청동기, 상아와 파이앙스 제품이 들어갔습니다. 왕묘 주변에서는 수많은 소의 두개골도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소는 재산이면서 신분과 의례를 표현하는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단검과 거울, 장신구를 함께 보면 케르마가 고립된 사막 왕국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금속을 다루는 장인이 있었고 상류층은 정교한 물건을 사용했습니다. 이집트와 중앙아프리카, 홍해 방면에서 들어온 물품도 확인됩니다.
무덤 하나를 열었는데 정치와 경제, 종교와 교역이 한꺼번에 보입니다. 그래서 고고학자에게 왕묘는 죽은 사람의 공간인 동시에 살아 있던 사회를 복원하는 거대한 기록입니다.
3. 이집트 파라오가 누비아에 남긴 신전
금을 찾아 남쪽으로 내려온 이집트

이제 전시실의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상형문자가 나타나고 파라오와 이집트 신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고대 이집트에게 누비아는 놓칠 수 없는 지역이었습니다. 금을 비롯한 자원이 풍부했고 아프리카 내륙으로 이어지는 나일강 교역로를 장악할 수 있는 전략적 공간이었습니다.
신왕국 시대에는 투트모세 1세를 비롯한 이집트 파라오들이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했습니다. 요새와 행정 거점, 신전이 들어섰고 이집트의 왕권 체계와 종교, 상형문자와 미술이 누비아 사회와 강하게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누비아가 이집트 문화를 그대로 복제한 것은 아닙니다. 받아들인 요소를 지역 전통과 결합했고, 몇 세기 뒤에는 그 문화적 언어를 이용해 자신들이 이집트의 정통 파라오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박물관 문을 열고 나오면 실제 고대 신전이 기다린다

수단 국립박물관에서 가장 뜻밖의 장면 가운데 하나는 건물 밖에서 만납니다. 정원으로 나가면 복제품이 아니라 누비아에서 실제로 옮겨온 고대 신전과 건축 유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헨(Buhen), 세므나(Semna), 쿰마(Kumma)와 같은 유적의 일부가 이곳에 옮겨져 있습니다.


20세기 아스완 하이댐 건설로 나일강 수위가 높아지면서 수많은 누비아 유적이 수몰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국제적인 구조 사업이 진행되었고 일부 신전은 석재를 하나씩 해체한 뒤 안전한 장소에서 다시 조립했습니다.

그래서 이 정원은 단순한 야외 전시장이 아닙니다. 사라질 뻔했던 고대 누비아의 건축을 새로운 장소에서 다시 살려낸 거대한 문화유산 구조 현장입니다.
부헨과 세므나에서는 군대와 신전이 함께 있었다

부헨은 나일강 제2급류 부근에 자리한 중요한 군사 거점이었습니다. 이집트는 이곳에 대규모 요새를 구축해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감시하고 남쪽으로 향하는 길을 통제했습니다.
세므나와 맞은편의 쿰마 역시 강폭이 좁아지는 전략적 장소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곳에 군사시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신전도 함께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국경을 지키는 군사력과 신에게 제사를 올리는 종교, 그리고 파라오의 권위가 같은 공간에서 작동했습니다. 고대 국가의 국경은 오늘날 지도 위의 선보다 훨씬 복합적인 정치 공간이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여전히 이집트가 이야기의 중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다음 전시에서 역사의 방향이 완전히 뒤집힙니다.
이번에는 누비아의 왕들이 북쪽으로 올라갑니다.
4. 누비아의 왕들이 이집트의 파라오가 되다
피예가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역사의 방향이 바뀌었다

수단 고대사를 처음 접한다면 아마 이 대목에서 가장 크게 놀라게 됩니다. 한때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던 누비아에서 다시 강력한 쿠시 왕국이 성장했고, 기원전 8세기에는 쿠시 왕들이 북쪽으로 진출해 이집트를 장악합니다.
그 시작을 상징하는 인물이 피예(Piye)입니다. 그의 승전비에는 이집트 원정과 승리가 긴 상형문자 기록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비석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전쟁의 승리를 기록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피예는 자신을 외부에서 침입한 왕으로만 표현하지 않고 아문 신의 선택을 받은 정통 통치자로 내세웠습니다.

피예에 이어 샤바카, 샤바타카, 타하르카, 탄타마니가 이집트 제25왕조의 파라오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누비아 파라오 또는 쿠시계 파라오로 불리며, 대중적으로는 검은 파라오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역사의 방향이 흥미롭게 뒤집힙니다. 오랫동안 이집트가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했다면 이제 누비아의 왕이 이집트 왕관을 쓰고 나일강 세계를 통치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왕들이 이집트 문화를 없애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오래된 종교와 왕권 전통을 적극적으로 되살리며 자신들이 정통 파라오임을 강조했습니다.
5. 게벨 바르칼과 타하르카, 쿠시 왕권의 절정
산 하나가 왕국의 성지가 되다

쿠시 왕국을 이해하려면 게벨 바르칼(Jebel Barkal)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나일강 옆 평원에서 갑자기 솟아오른 거대한 사암산은 고대인에게 단순한 자연 지형이 아니었습니다.

게벨 바르칼은 아문 신앙과 연결된 성산으로 여겨졌고 쿠시 왕들은 이곳을 정치적·종교적 중심지로 발전시켰습니다. 산기슭에는 아문 신전을 비롯한 여러 신전과 왕궁이 들어섰고 주변에는 왕실 묘역이 형성되었습니다.

아문 신앙은 단순한 종교적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아문의 선택을 받은 왕이라는 개념은 왕권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강력한 정치적 언어였습니다. 그래서 게벨 바르칼에서는 산과 신전, 왕궁과 왕실 묘지가 하나의 거대한 권력의 풍경을 이룹니다.
왕의 얼굴에는 이집트와 누비아가 함께 남아 있다

제25왕조의 왕실 조각 앞에서는 얼굴과 머리 장식을 천천히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에는 익숙한 이집트 파라오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쿠시 왕실만의 특징이 드러납니다.
네메스 머리장식과 왕관, 한쪽 발을 앞으로 내딛는 자세와 우라에우스는 오래된 이집트 왕실 미술의 문법입니다. 그러나 얼굴 표현과 장신구에는 제25왕조 특유의 요소가 더해집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왕의 이마입니다. 쿠시 왕실 도상에서는 두 마리의 우라에우스, 즉 두 코브라를 나란히 세운 장식이 특징적으로 나타납니다.
모든 쿠시 왕상이 똑같은 형식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중 우라에우스는 제25왕조 왕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표지입니다. 이집트에서 오랫동안 왕권과 신성한 보호를 상징했던 코브라가 쿠시 왕실의 새로운 정치적 의미와 결합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서 이름 하나를 기억한다면 타하르카(Taharqa)를 추천합니다.
기원전 7세기 제25왕조를 대표하는 타하르카는 이집트와 누비아 곳곳에서 대규모 건축 사업을 벌였습니다. 그의 조각에서는 이집트 파라오의 형식과 쿠시 왕실의 특징이 특히 선명하게 만납니다.
타하르카와 쿠시 왕들을 보고 있으면 제25왕조를 단순한 정복 왕조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이들은 오래된 이집트 왕권과 종교를 깊이 이해했고 그 전통을 이용해 자신들의 통치가 정당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피라미드 아래에는 왕의 사후세계가 준비되어 있었다
쿠시 왕실의 이야기는 왕의 죽음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엘쿠루와 누리 같은 왕실 묘역에는 기자보다 작고 가파른 피라미드가 세워졌고 그 아래에는 왕과 왕비의 사후세계를 위한 다양한 부장품이 들어갔습니다.

대표적인 부장품이 우샤브티입니다. 작은 사람 모양의 인형으로, 사후세계에서 죽은 이를 대신해 노동하도록 무덤에 넣었습니다. 타하르카의 무덤에서도 여러 재질의 우샤브티가 발견되었습니다.

누리 왕묘에서는 왕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금제 장신구와 귀금속 공예품도 발견되었습니다. 작은 장신구 하나에도 신과 왕,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아스펠타 왕의 금·은제 보물까지 보고 나면 쿠시 왕실 문화를 단순히 이집트의 모방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이집트에서 받아들인 장례 전통 위에 누비아 왕실의 취향과 공예 기술이 더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25왕조의 이집트 지배가 끝난 뒤에도 쿠시 왕국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왕국의 중심은 점차 더 남쪽으로 이동했고 왕과 왕비의 모습, 신의 형태, 문자와 장식은 이전보다 훨씬 독자적인 방향으로 변해갑니다.
마침내 나일강 동쪽 사막에 수십 기의 날카로운 피라미드가 솟은 도시가 등장합니다.
메로에(Meroë).
2부에서는 이 메로에의 피라미드와 강력한 왕실 여성들, 황금 장신구와 사자신 아페데마크,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은 문자에서 출발해 중세 누비아의 파라스 대성당까지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