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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전시실에서 수천 년 전의 세르비아를 만났다면, 이제 계단을 올라 전혀 다른 유럽으로 들어갈 차례입니다. 금빛 성모와 성인들이 나타나고, 르네상스의 인물들은 조금씩 인간다운 표정을 얻습니다. 그다음에는 베네치아의 빛과 색채가 기다리고 있지요.
세르비아 국립박물관의 외국미술 컬렉션에는 14세기부터 20세기까지 약 1,100점의 회화와 조각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중 이탈리아 회화는 중세의 금빛 종교화에서 르네상스를 지나 18세기 베네치아 풍경화까지, 유럽 회화가 변해가는 과정을 따라 걷기에 좋은 컬렉션입니다.
그림 앞으로 조금 가까이 가서 얼굴을 보고, 손끝을 보고, 화가가 빛을 어디에 떨어뜨렸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오래된 그림은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하지만, 오래 바라보아야 비로소 발견되는 것도 많습니다.

1. 금빛 성모에서 르네상스로, 이탈리아 회화의 문을 열다
금빛 배경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첫 번째 그림 앞에서는 잠시 걸음을 늦춰보겠습니다. 성모와 아기 예수가 정면을 향하고 그 뒤로 금빛이 가득합니다. 오늘날에는 화려한 장식처럼 보이지만, 중세 회화에서 금은 현실의 풍경을 대신하는 특별한 시각 언어였습니다.

《그리스도 탄생》에서도 산과 건축물은 보이지만 우리가 실제로 바라보는 풍경처럼 펼쳐지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장소보다 성스러운 사건입니다. 금빛은 화면을 일상의 시간과 공간에서 떼어내고, 촛불이 흔들리는 교회 안에서는 실제 금속처럼 빛을 받아 더욱 강렬하게 반짝였을 것입니다.
세르비아 국립박물관의 이탈리아 회화는 바로 이런 14세기 작품들에서 출발합니다. 파올로 베네치아노 계열의 회화에서는 비잔틴의 장엄함과 서유럽 고딕 회화의 세련된 선이 만납니다. 이 시기의 그림에서는 얼굴 하나만 보기보다 인물의 크기와 자세, 금빛 배경과 옷자락이 만드는 화면 전체의 질서를 함께 보는 것이 좋습니다.
얼굴과 공간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몇 걸음 더 옮기면 변화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파올로 디 조반니 페이에게 귀속된 삼면화에는 여전히 금빛과 엄격한 종교적 질서가 남아 있지만, 인물의 몸과 옷주름에는 조금씩 부피감이 생깁니다.
중세가 어느 날 끝나고 다음 날 르네상스가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몸은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변하고, 공간에는 깊이가 생기며, 성모와 성인의 표정에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감정이 스며들었습니다. 전시실에서는 그 긴 변화가 불과 몇 걸음 사이에 펼쳐집니다.
2. 성인도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화가들의 새로운 시선
로렌초 디 크레디의 세계에서는 얼굴을 먼저 보자
이제 피렌체 르네상스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이름은 로렌초 디 크레디입니다. 그는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수련했고, 젊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역시 이 공방을 거쳤습니다. 여러 화가와 도제가 함께 기술과 도안을 공유하던 르네상스의 중요한 제작 현장이었습니다.

여기서는 작품의 귀속을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로렌초 디 크레디와 연결되어 온 이 작품은 현재 박물관 연구에서 디 크레디와 가까운 추종자의 작품으로 해석됩니다. 오히려 이런 귀속 문제는 르네상스 공방이 어떻게 하나의 도상과 화풍을 공유하고 확산시켰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단서입니다.
먼저 원형 화면인 톤도(tondo)를 보십시오. 아기 예수는 화면 아래에 놓이고 성모와 주변 인물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모입니다. 둥근 틀을 따라 인물들이 아기를 감싸면서 관람객의 시선도 자연스럽게 중심으로 이끌립니다.
성모의 고개 숙인 얼굴에는 과장된 감정보다 조용한 경건함이 담겨 있습니다. 뒤편으로는 건축물과 나무, 산과 들판이 이어지고 멀어질수록 풍경이 희미해집니다. 앞에서 보았던 금빛 초월 공간과 달리, 성스러운 사건이 이제 빛과 공기와 거리를 가진 현실적인 세계 안에서 벌어집니다.
그래서 이 작은 원형 그림은 르네상스의 변화를 꽤 잘 보여줍니다. 신성함을 잃은 것이 아니라, 인간의 표정과 몸짓, 자연과 공간을 이용해 그 신성함을 보다 친밀하게 전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카르파초의 그림에서는 옷과 항구까지 이야기가 된다
피렌체와는 또 다른 르네상스를 보여주는 곳이 베네치아입니다. 그 세계를 설명하기 좋은 화가가 비토레 카르파초입니다. 세르비아 국립박물관에도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지만, 카르파초 특유의 이야기 방식과 세밀한 도시 묘사를 한눈에 보기 위해 잠시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대표작을 함께 보겠습니다.

이 그림에서는 주인공부터 찾으려고 서두르지 마십시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시선을 움직이면 만남과 작별, 출발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거대한 항구를 무대로 이어집니다. 하나의 그림 안에서 여러 장면이 흘러가는 카르파초 특유의 서사 방식입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전설의 무대입니다. 먼 과거의 성 우르술라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건축물과 선박, 화려한 의복과 직물에는 카르파초가 알고 있던 베네치아의 현실이 스며 있습니다. 성인의 전설을 보고 있는데 어느 순간 15세기말 국제적인 항구도시를 구경하게 됩니다.


세부를 확대하면 이야기가 더 재미있어집니다. 의복의 무늬와 직물, 인물의 몸짓이 놀라울 만큼 촘촘합니다. 특히 화려한 카펫과 직물은 당시 지중해와 동방을 연결하던 베네치아의 무역과 부를 떠올리게 합니다.
카르파초의 그림에서는 그래서 배 한 척이나 옷 한 벌도 그냥 배경이 아닙니다. 성인의 전설을 따라가다가 작은 사물에 시선을 빼앗기고, 그 사물을 따라가다 보면 500여 년 전 베네치아 사람들의 생활과 취향까지 만나게 됩니다. 종교화가 도시의 역사까지 들려주는 순간입니다.
3. 베네치아의 색채가 화면을 뒤덮다, 틴토레토에서 과르디까지
틴토레토 앞에서는 시선과 몸짓의 방향을 따라가자
이제 전시실의 공기가 다시 바뀝니다. 인물의 몸짓은 커지고 빛과 색은 더욱 극적으로 움직입니다.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 야코포 틴토레토가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성모와 아기 예수만 보지 말고 오른쪽의 모피 망토를 걸친 남성까지 한꺼번에 보십시오. 그는 성서 속 인물이 아니라 현실의 베네치아 원로원 의원입니다. 성스러운 존재와 현실의 후원자가 같은 화면에 들어온 것입니다.
특히 아기 예수가 남성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이 재미있습니다. 작은 손과 시선이 두 세계를 연결하고, 성모의 차분한 모습과 의원의 묵직한 존재감이 서로 균형을 이룹니다. 틴토레토의 그림에서는 이런 시선과 몸짓의 방향을 따라가면 화면이 훨씬 생생하게 읽힙니다.
세르비아 국립박물관의 이탈리아 회화에는 틴토레토와 함께 바사노 계열의 작품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무렵 베네치아 화가들에게 색은 물체를 칠하는 수단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빛과 색 자체가 분위기와 감정을 움직이는 중요한 언어가 됩니다.
성모와 성인이 떠나자 베네치아라는 도시가 주인공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면 화면을 지배하던 성모와 성인 대신 도시가 앞으로 걸어 나옵니다. 프란체스코 과르디의 베네치아입니다.
이 그림에서는 건축물 하나하나를 세기보다 한두 걸음 물러나 전체 분위기를 먼저 느껴보는 편이 좋습니다. 붓질은 가볍고 빠르며, 건물과 사람 사이로 번지는 빛이 광장 전체를 흔들어 놓습니다. 과르디에게 베네치아는 정확한 도시 기록인 동시에 순간의 공기와 인상을 담아내는 무대였습니다.
여기까지 왔다면 처음 보았던 금빛 성모를 잠시 떠올려도 좋겠습니다. 신성한 세계를 나타내던 황금빛 배경은 어느새 실제 하늘과 광장의 빛으로 바뀌었습니다. 몇 개의 그림을 지나왔을 뿐인데 화가가 바라보는 세계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런데 다음 전시실에서는 분위기가 또 한 번 뒤집힙니다. 기괴한 괴물이 성인을 유혹하고, 낙원에는 수많은 동물이 등장하며, 꽃 한 다발에도 놀라운 관찰력이 쏟아집니다. 마지막에는 사냥을 마치고 돌아오는 디아나와 루벤스의 바로크 세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제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의 전시실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4. 기괴한 악마와 꽃다발 사이, 플랑드르 화가들의 놀라운 세계
그림 앞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야기가 많아진다
이탈리아 전시실을 지나 북유럽 회화로 넘어오면 그림을 보는 방법도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한두 걸음 앞으로 다가가 보겠습니다.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화가들은 화면 구석까지 좀처럼 비워두지 않습니다. 옷의 주름과 보석, 나뭇잎 사이의 새 한 마리까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새로운 이야기가 발견됩니다.
세르비아 국립박물관에는 약 120점의 네덜란드·플랑드르 옛 거장 회화가 있으며, 그 출발점에서 특별한 사연을 가진 그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작자 미상의 그림에서 사라진 제단화의 한 조각으로

이 작품은 그림 자체만큼이나 잃어버린 이름을 되찾은 과정이 흥미롭습니다. 세르비아 국립박물관은 1966년 한 이탈리아 외교관에게서 작품을 구입했지만 당시에는 화가를 알지 못해 플랑드르 작가 미상의 작품으로 분류했습니다.
전환점은 2003년 암스테르담에서 찾아왔습니다. CODART 학회에서 작품 사진을 본 미술사학자 틸홀거 보르헤르트가 후안 데 플란데스의 작품임을 알아본 것입니다. 조사 결과 이 그림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를 위해 제작된 미라플로레스 제단화에서 오랫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던 패널로 확인되었습니다.
후안 데 플란데스는 이름 그대로 플랑드르 출신으로 여겨지는 화가입니다. 정확한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5세기 말 스페인에서 이사벨 1세의 궁정화가로 활동했습니다. 북유럽 특유의 세밀한 묘사와 스페인 궁정 문화가 그의 작품에서 만났습니다.
그림에서는 세례자 요한만 보지 말고 주변 인물과 풍경까지 천천히 훑어보십시오. 얼굴과 의복, 바위와 나무가 작은 화면 안에 촘촘하게 이어집니다. 성서의 장면이지만 인물과 자연은 관찰한 현실처럼 구체적입니다.
해체된 제단화의 패널들은 오랜 세월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베오그라드에 있던 한 점이 확인되면서 사라졌던 퍼즐 하나가 다시 맞춰졌습니다. 박물관의 그림은 때때로 액자 안의 이야기뿐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이름과 역사를 되찾는 과정까지 들려줍니다.
성 안토니우스 주변에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이번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조금 이상하고, 오래 들여다볼수록 더 이상해지는 그림입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추종자가 그린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입니다. 먼저 성 안토니우스를 찾아보고, 그다음 주변을 천천히 훑어보십시오. 기괴한 생물과 악마, 사람인지 동물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형상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괴물들은 단순히 관람객을 놀라게 하기 위한 장식이 아닙니다. 성 안토니우스를 흔드는 유혹과 공포, 죄에 대한 두려움을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바꾸어 놓은 존재들입니다. 16세기 관람객에게는 지금의 판타지 괴물보다 훨씬 무거운 종교적 의미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악마를 그리려던 순간 화가의 상상력도 가장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성 안토니우스를 찾은 다음 어느새 주변 괴물들을 하나씩 구경하게 됩니다. 무서운 그림인데 묘하게 눈을 떼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보스 자신은 어떤 세계를 그렸을까?
여기서 잠시 세르비아 국립박물관을 벗어나 보스 자신의 그림 한 점을 함께 보겠습니다. 추종자들이 그토록 닮고 싶어 했던 세계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고 나면, 앞에서 본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도 훨씬 재미있게 보입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쾌락의 정원(The Garden of Earthly Delights)》은 약 1490~1500년에 제작된 3면화로,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보스의 기괴하고 환상적인 상상력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릴 만한 대표작입니다.
그림을 왼쪽부터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왼쪽에는 아담과 이브가 있는 에덴동산이 펼쳐지고, 중앙으로 눈을 옮기면 수많은 사람과 거대한 과일,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동물과 기묘한 구조물이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얼핏 보면 즐거운 낙원처럼 보이지만 프라도 미술관은 이 중앙 장면을 감각적 쾌락과 욕망에 빠진 거짓된 낙원으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패널에 도착하면 색과 분위기가 갑자기 어두워집니다. 이곳은 지옥입니다. 거대한 악기와 괴물들이 사람을 괴롭히고, 사람과 동물과 사물이 뒤섞인 기괴한 존재들이 화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특히 악기가 고문의 도구로 변한 장면 때문에 이 부분은 흔히 음악의 지옥이라고도 불립니다.
이제 다시 세르비아 국립박물관의 《성 안토니우스의 유혹》을 떠올려보십시오. 사람과 동물을 뒤섞은 괴물, 불길한 풍경, 작은 공간마다 숨어 있는 기묘한 사건들이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훨씬 선명하게 보입니다. 보스의 추종자들이 단순히 괴상한 생김새만 흉내 낸 것이 아니라, 죄와 욕망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기괴한 상상력으로 눈앞에 펼쳐 보이는 방식까지 이어받으려 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보스의 그림에서는 그래서 괴물을 몇 마리 찾았는지가 전부가 아닙니다. 아름다운 낙원과 유혹, 즐거움과 불안, 그리고 그 끝에 놓인 지옥을 한 화면에서 이어 보게 만드는 것이 그의 힘입니다. 《쾌락의 정원》을 한 번 보고 나면, 세르비아 국립박물관에 있는 이름 없는 추종자의 그림도 더 이상 낯선 괴물들의 집합으로만 보이지 않습니다.
마르턴 더 포스의 낙원에는 동물이 몇 마리나 있을까?

기괴한 악마들의 세계를 빠져나오면 이번에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복잡한 그림이 기다립니다. 마르턴 더 포스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낙원》입니다.
아담과 이브만 보고 지나치기에는 주변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사자와 말, 새를 비롯한 동물들이 화면 곳곳을 채우고 있습니다. 성서 속 에덴동산이면서 동시에 화가가 알고 있던 자연의 세계를 한자리에 펼쳐놓은 거대한 동물도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16세기 유럽에서는 먼 지역과의 교류가 확대되면서 새로운 동식물에 관한 지식도 빠르게 늘어났습니다. 자연을 관찰하고 기록하려는 관심은 미술에도 스며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에서는 아담과 이브를 찾은 뒤 화면 속 동물을 한 마리씩 찾아보는 것도 훌륭한 감상법입니다.
꽃 한 다발에도 시간과 상징이 숨어 있다

이번에는 얀 브뤼헐 1세의 《꽃》 앞으로 가보겠습니다. 언뜻 보면 아름다운 꽃다발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꽃잎의 가장자리와 줄기, 작은 잎까지 놓치지 않은 놀라운 세밀함이 보입니다.
서로 다른 계절에 피는 꽃을 한 화면에 모은 꽃 정물은 눈앞의 꽃다발을 그대로 복사한 장면이라기보다, 여러 관찰과 연구를 바탕으로 현실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이상적인 꽃다발을 완성한 회화적 세계였습니다.
아름다움에는 시간도 숨어 있습니다. 활짝 핀 꽃은 결국 시들기 때문입니다. 풍요와 생명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라지는 시간과 삶을 떠올리게 하는 것도 꽃 정물의 오래된 매력입니다.
보스 계열의 괴물에서 《낙원》의 동물들, 다시 브뤼헐의 꽃잎까지. 플랑드르 회화에서는 작은 것을 들여다보는 일이 결코 작은 감상이 아닙니다.
작은 동판 안에서 기병대가 충돌하다


꽃과 낙원을 충분히 들여다봤다면 마지막에는 조금 더 소란스러운 그림으로 가보겠습니다. 세바스티안 브랑크스의 《레커르베이체 전투》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 작품이 거대한 전쟁화가 아니라 작은 구리판에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입니다. 화면에서는 말을 탄 병사들이 뒤엉키고 무기가 교차하며, 작은 공간이 순식간에 전쟁터로 변합니다.
그림의 무대는 1600년 네덜란드 뷔흐트 인근에서 벌어진 레커르베이체 전투입니다. 80년 전쟁 중 벌어진 기병 전으로, 브랑크스는 멀리서 전쟁 전체를 설명하기보다 기병들이 충돌하는 순간을 촘촘하게 담았습니다.
꽃잎 하나를 따라가던 눈으로 이번에는 말과 병사를 찾아보십시오. 세부를 놓치지 않는 플랑드르 화가들의 시선이 꽃다발과 낙원뿐 아니라 전쟁터에서도 힘을 발휘합니다.
5. 사냥의 여신이 등장하다, 루벤스로 만나는 바로크의 절정
조용히 서 있던 인물들은 이제 화면 밖으로 뛰쳐나올 듯하다
이제 이번 관람의 마지막 구간입니다. 처음 만났던 중세의 성모를 떠올려보십시오. 인물들은 엄숙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세기를 지나 바로크에 도착하면 사람들이 좀처럼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몸은 비틀리고 천은 펄럭이며 사람과 동물의 시선이 교차합니다. 화면 전체에 움직임이 번지는 이 세계에서 만나볼 작품이 루벤스 공방과 프란스 스나이더스가 함께 제작한 《사냥에서 돌아오는 디아나》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한 사람이 모두 그리지 않았다

먼저 화면 전체를 보겠습니다. 사냥의 여신 디아나와 일행, 사냥개와 사냥감, 과일과 여러 사물이 한꺼번에 등장합니다. 인물만으로도 화면이 가득한데 동물과 정물까지 강한 존재감을 드러내니 시선이 쉴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복잡한 화면에는 17세기 안트베르펜 미술의 흥미로운 제작 방식이 숨어 있습니다. 루벤스는 대규모 공방을 운영했고, 필요에 따라 특정 분야에 뛰어난 화가들과 협업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프란스 스나이더스가 과일과 사냥개, 사냥감이 있는 정물 부분을 담당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그림을 보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사냥개의 털과 움직임, 축 늘어진 사냥감의 무게, 과일의 표면을 차례로 살펴보십시오. 정물과 동물이 인물을 꾸며주는 배경이 아니라 화면의 드라마를 함께 만드는 주역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당시 플랑드르에서는 인물과 풍경, 동물, 꽃과 과일처럼 서로 다른 분야에 능한 화가들이 하나의 작품에 참여하는 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사냥에서 돌아오는 디아나》는 신화 속 사냥 이야기를 그린 작품인 동시에 17세기 안트베르펜의 거대한 미술 제작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합니다.
금빛 성모에서 사냥의 여신까지
이제 처음 들어왔던 전시실을 잠시 떠올려보겠습니다. 출발점에는 금빛 배경 앞에 조용히 앉아 있던 성모가 있었습니다. 공간은 상징적이었고 인물의 자세는 엄숙했습니다.
르네상스에 들어서자 화가들은 사람의 얼굴과 몸, 눈앞의 현실과 공간을 더욱 적극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베네치아에서는 빛과 색채가 화면을 풍성하게 채웠고, 과르디의 시대에는 도시의 거리와 광장 자체가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북유럽으로 시선을 돌리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성 안토니우스 주변에는 기괴한 괴물들이 나타났고, 낙원에는 온갖 동물이 모여들었습니다. 브뤼헐은 꽃잎 하나까지 집요하게 관찰했고, 브랑크스는 그 세밀한 눈으로 작은 구리판 위에 격렬한 전쟁터를 펼쳐놓았습니다.
그리고 루벤스의 바로크 세계에 도착하자 화면은 더 이상 조용히 머물지 않습니다. 사람과 동물이 움직이고, 몸은 비틀리며, 화면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무대처럼 살아납니다.
몇 개의 전시실을 걸어왔을 뿐인데 그 안에는 수백 년의 변화가 들어 있었습니다. 종교와 인간, 자연과 도시를 바라보는 화가들의 시선도 시대와 함께 끊임없이 달라졌습니다. 세르비아 국립박물관에서 옛 거장들의 작품을 보는 재미는 유명한 이름을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같은 세계를 바라보면서도 시대마다 전혀 다른 답을 내놓았던 화가들의 눈을 따라 걷는 것, 그것이 이 전시실을 여행하는 또 하나의 즐거움입니다.
하지만 세르비아 국립박물관의 미술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대를 조금 더 내려가면 미술은 다시 크게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모네와 르누아르는 빛과 순간의 인상을 붙잡으려 했고, 드가와 고갱을 비롯한 화가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에서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섰습니다. 회화뿐 아니라 조각에서도 이전과 다른 표현과 시선이 등장합니다.
금빛 성모에서 출발해 루벤스의 화려한 바로크까지 걸어온 오늘의 관람은 여기에서 마치겠습니다. 다음 산책에서는 옛 거장들의 전시실을 벗어나 근대미술과 조각이 기다리는 공간으로 걸음을 옮겨보겠습니다. 오래 지켜온 미술의 규칙이 어떻게 흔들리고 새로운 미술로 이어지는지, 이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