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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7천 년 전, 누군가는 죽은 뒤에도 온몸을 황금으로 장식한 채 묻혔습니다. 바르나 고고학 박물관(Archaeological Museum of Varna)에서 만나는 황금은 화려한 보물인 동시에, 인류 사회에 부와 권력이 어떻게 나타나기 시작했는지를 보여주는 오래된 증거입니다.
이번 관람에서는 황금의 양보다 그 뒤에 숨은 사람들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누가 금을 만들었고, 누가 그것을 가질 수 있었으며, 왜 죽은 사람에게까지 그토록 많은 황금을 넣어주었을까요?

1. 7천 년 전, 바르나에서는 이미 황금이 빛나고 있었다
세계적인 발견은 공사 현장에서 시작됐다

먼저 박물관 진열장보다 1972년 바르나 서쪽의 공사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지하 케이블을 설치하던 굴착기 기사 라이초 마리노프(Raycho Marinov)가 땅속에서 금과 구리 물건, 부싯돌 도구를 발견했습니다. 처음에는 몇 점의 오래된 물건처럼 보였지만, 발굴이 이어지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 아래에는 기원전 약 4600~4200년의 동기시대 공동묘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바르나 네크로폴리스(Varna Necropolis)라고 부르는 유적입니다.
현재까지 조사된 무덤은 294기. 그런데 여기서 나온 금제품만 3,000점 이상, 총중량 6kg 이상입니다. 금제품의 형태도 38종이 넘습니다. 작은 구슬과 장식판부터 팔찌와 목걸이, 몸과 의복을 장식했던 금제품까지 종류가 놀라울 정도로 다양합니다.

왕관보다 작은 금조각이 더 놀라운 이유
우리가 흔히 '황금 보물'이라고 하면 거대한 왕관이나 금잔부터 떠올리지만, 바르나의 진열장에는 작은 금장식판과 고리, 구슬 같은 물건이 빼곡합니다.
"7천년 전이라 색만 금빛인 물건이겠지"가 아니라, 실제로 현대 기준으로도 24k 순금에 가까운 황금이라서 정말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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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만 보면 소박해 보입니다. 하지만 연대를 알고 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 유물군은 현재 알려진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가공 황금 유물로 평가됩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나 미케네의 황금 보물이 등장하기 훨씬 전, 흑해 서쪽에서는 이미 금을 두드리고 형태를 만들어 사람의 몸과 옷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금 한 점의 크기보다 “이걸 대체 언제 만들었지?”라는 생각부터 해보는 편이 좋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화려한 보물 몇 점이 아니라 금세공 기술이 아주 이른 시기에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금팔찌를 보면 이제 기술보다 사람이 궁금해진다

4호 무덤의 대형 금팔찌 앞에서는 질문이 하나 더 생깁니다. 금을 찾아내고 장신구로 만드는 기술도 놀랍지만, 누가 이런 물건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금을 채취하고 가공하려면 원료와 기술, 그리고 상당한 노동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바르나 네크로폴리스의 금은 모든 무덤에 고르게 나뉘어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소수의 무덤에 놀라울 만큼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황금은 장신구를 넘어 사회적 지위와 권력의 흔적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이제 등장합니다.
2. 43호 무덤, 한 사람에게 왜 이렇게 많은 금을 묻었을까?
금 990점, 박물관의 진짜 주인공을 만나다

바르나 고고학 박물관에서 한 전시만 오래 보라고 한다면 저는 43호 무덤(Grave 43) 앞에 멈추겠습니다.
이곳에 묻힌 성인 남성 주변에서는 990점의 금제품, 총 약 1.5kg이 발견되었습니다. 박물관은 유골과 부장품이 놓였던 위치를 보여주기 때문에 단순히 금제품을 진열장에서 보는 것과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머리와 목, 가슴과 팔 주변을 따라 금 장식이 이어집니다. 그래서 사진만 보면 흔히 '황금 인간'이라고 부르고 싶어 지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금의 양보다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놓였는가입니다.
이 사람은 살아 있을 때도 특별한 위치에 있었고, 죽은 뒤에도 그 지위가 장례를 통해 드러났을 가능성이 큽니다. 무덤 하나가 당시 사회의 서열을 눈앞에 펼쳐놓는 듯합니다.
목걸이와 팔찌가 장식에서 권력의 언어로 바뀐다

조금 더 가까이 보겠습니다. 43호 무덤에서는 삼중 목걸이와 대형 팔찌를 비롯한 여러 금장식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아주 부유한 사람이었구나”라고만 읽으면 절반밖에 보지 못합니다. 네크로폴리스 전체에서 금제품이 발견된 무덤은 일부에 불과했고, 특히 1·4·36·43호 무덤에 대부분의 금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공동체의 묘지인데 누구의 무덤에는 황금이 쏟아지고, 누구의 무덤에는 거의 없습니다. 오늘날처럼 통장 잔액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무덤만으로도 사회 안에 상당한 지위 차이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읽을 수 있습니다.
금옆에 놓인 망치와 홀, 이 남자는 누구였을까?

이제 금장신구만 보지 말고 그 옆의 물건에도 눈을 돌려보세요. 바르나 네크로폴리스에서는 홀과 망치 형태의 권력 표장, 무기와 도구처럼 특별한 지위를 암시하는 물건들도 발견되었습니다.
43호 무덤에서도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되는 물건과 금속공 장인의 도구로 여겨지는 부장품이 함께 확인됩니다. 그래서 이 남자를 공동체의 지도자나 제사장적 역할을 맡았던 인물로 보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다만 정확히 어떤 직책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미지의 부분 때문에 더 흥미롭습니다. 왜 권력자의 무덤에 금속을 다루는 도구가 함께 들어갔을까요? 희귀한 금속을 만들고 통제하는 능력 자체가 권위와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약 7천 년 전의 무덤인데 질문은 의외로 낯설지 않습니다. 누가 귀한 자원을 가졌고, 누가 그것을 만들었으며, 그 부는 어떻게 권력으로 바뀌었는가. 43호 무덤은 황금보다 훨씬 복잡한 인간 사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3. 황금보다 놀라운 것은 그것을 만든 사회였다
황금 옆의 구리 도구를 지나치면 안 되는 이유

황금 전시를 보고 나면 바로 다음 진열장의 도구들은 조금 심심해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냥 지나가면 바르나 문화의 중요한 절반을 놓치게 됩니다.
네크로폴리스에서는 160점이 넘는 구리제품과 230점 이상의 부싯돌 제품도 발견되었습니다. 금을 아름답게 다룰 수 있었다는 것은 우연히 반짝이는 금속을 주웠다는 뜻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미 여러 재료의 성질을 알고, 목적에 맞게 가공하는 기술을 축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 기술이 등장했다고 옛 기술이 바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구리 도구 옆에는 여전히 날카롭게 다듬은 부싯돌이 사용됩니다. 돌과 금속이 한 시대를 함께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역사는 교과서처럼 ‘석기시대 종료, 금속시대 시작’ 하고 깔끔하게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습니다. 더 좋은 재료가 필요한 곳에는 금속을 쓰고, 여전히 훌륭한 도구에는 돌을 사용했습니다. 실제 사람들의 선택은 시대 구분표보다 훨씬 현실적이었습니다.
조개팔찌 하나가 바르나 밖의 세계를 데려온다

이번에는 금보다 훨씬 수수한 스폰딜루스(Spondylus) 조개를 보겠습니다. 그런데 고고학자에게는 이 조개가 금 못지않게 귀한 이야깃거리입니다.
바르나 네크로폴리스에서는 지중해산 연체동물의 껍데기로 만든 팔찌와 구슬, 장식판 등 약 1,100점의 장식품이 확인되었습니다. 바르나 주변에서 무엇을 만들었는지만 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물건들입니다.
쉽게 말하면 조개껍데기 하나가 지도를 펼쳐주는 것입니다. 흑해 서쪽의 바르나 공동체가 고립되어 살았던 것이 아니라, 먼 지역과 물건과 원료가 이동하는 장거리 교류망에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합니다.
금팔찌가 “누가 권력을 가졌는가”를 묻는다면, 스폰딜루스 팔찌는 “이 사람들은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었는가”를 묻습니다. 같은 장신구인데 들려주는 이야기는 전혀 다릅니다.
토기 한 점에서도 장식 욕구는 숨길 수 없다

선사시대 전시에서 동기시대 토기도 한번 천천히 보세요. 황금 옆이라 눈길을 빼앗기기 쉽지만, 토기의 표면에는 당시 사람들의 취향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사진 속 그릇에는 짙은 바탕 위로 소용돌이와 원형 무늬가 이어집니다. 먹고 저장하는 데 필요한 그릇이라면 기능만 갖춰도 되었을 텐데, 사람들은 굳이 표면을 다듬고 무늬를 넣었습니다.
7천 년이 지나도 이 부분만큼은 꽤 친숙합니다. 생활에 필요한 물건이라고 해서 예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호수의 여신’, 작은 점토 얼굴 앞에서는 정답을 서두르지 말자

마지막으로 작은 점토 얼굴 하나를 만나보겠습니다. 흔히 ‘호수의 여신(The Goddess of the Lake)’이라고 불리는 후기 동기시대의 두상입니다.
금팔찌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정교한 초상처럼 얼굴이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도 아닙니다. 눈과 입, 귀 부분에는 구멍이 뚫려 있고 얼굴은 놀랄 만큼 단순화되어 있습니다.
이 인물이 정확히 누구를 나타냈는지, 어떤 의식에 사용됐는지는 쉽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이름에 ‘여신’이 붙었다고 해서 실제로 특정 신을 표현했다고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재미있습니다. 고고학 유물 앞에서는 모르는 것을 억지로 채우지 않는 것도 관람의 한 방법입니다. 7천 년 전 사람들도 어떤 존재의 얼굴을 만들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이제 처음 보았던 황금으로 다시 시선을 돌려보겠습니다. 그 황금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기적 같은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구리와 돌을 다루는 기술, 먼 지역과 이어진 교류망, 전문적인 장인, 의례와 사회적 위계가 서로 맞물린 사회가 있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습니다.
바르나에서 정말 놀라운 것은 6kg이 넘는 황금만이 아닙니다. 그 황금을 만들어내고, 특정한 사람에게 집중시키고, 죽은 뒤 무덤에까지 넣어준 사회가 이미 약 7천 년 전에 존재했다는 사실입니다.
4. 황금시대가 지나고, 바르나는 오데소스가 되었다
트라키아의 잔에 그리스의 취향이 들어왔다
이제 시간을 크게 건너뛰어 보겠습니다. 선사시대의 황금이 사라진 뒤에도 바르나 주변의 역사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철기시대로 들어서면 전시실에는 트라키아인과 켈트인, 스키타이인의 흔적이 등장하고 분위기도 한층 복잡해집니다.

그 변화를 보여주는 재미있는 유물이 기원전 500년경의 트라키아식 킬릭스(kylix)입니다. 킬릭스는 넓고 얕은 잔으로, 그리스 세계에서 포도주를 마실 때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사진 속 잔은 트라키아 문화권에서 만들어졌으면서도 그리스 도기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물건 하나에 두 문화가 함께 들어 있는 것입니다.
전시장에 놓인 말 장구 장식과 피불라, 장신구, 금속가공 도구와 무기까지 함께 보면 이 시대가 단순히 '트라키아인의 시대'였다고만 말하기 어려운 이유가 보입니다. 흑해 서부에서는 여러 집단이 만나고 물건과 기술, 취향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특히 트라키아 전시에서는 황금보물 하나를 찾기보다 무기와 말 장식, 장신구와 무덤 부장품을 함께 보는 편이 좋습니다. 전사와 기마 문화가 중요했던 사회의 모습이 여러 유물을 맞춰보듯 조금씩 완성됩니다.
아테네에서 만든 잔이 흑해까지 왔다

조금 더 내려오면 그리스의 영향은 훨씬 분명해집니다. 사진 속 기원전 400~350년경 아티카 적회식 도기에는 말을 탄 젊은 기수가 그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림보다 먼저 이 물건이 어디에서 왔는가입니다. '아티카'는 아테네가 있는 그리스 지역입니다. 아테네를 중심으로 제작된 도기가 바다를 건너 흑해 서쪽까지 들어왔다는 뜻입니다.
1부에서 스폰딜루스 조개가 먼 교류망을 암시했다면, 이제는 훨씬 분명한 증거가 나타납니다. 배에 실린 도기와 포도주, 장신구와 여러 상품이 흑해를 오갔고, 바르나는 그 길 위에 있었습니다.
바르나가 오데소스였던 시절, 항구에는 무엇이 들어왔을까?

이제 지도에서 오늘날의 바르나를 찾아보겠습니다. 고대에는 이곳을 오데소스(Odessos)라고 불렀습니다.
흑해 서쪽 해안에 자리 잡은 오데소스는 그리스 세계와 트라키아 내륙을 이어주는 항구도시로 성장했습니다. 이때부터 전시실의 유물도 무덤에서 나온 물건만이 아니라 배와 항구, 시장을 통해 이동한 물건들로 빠르게 늘어납니다.

그중 가장 알아보기 쉬운 것이 암포라(amphora)입니다. 손잡이가 두 개 달린 길쭉한 항아리로, 고대 지중해와 흑해에서는 포도주나 기름 같은 상품을 운반하는 대표적인 용기였습니다.
박물관은 배의 단면을 연상시키는 공간에 암포라를 배치해 놓았습니다. 생산지를 추적할 수 있는 암포라 조각과 인장까지 보고 있으면 항구에 배가 들어오고 짐을 내리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7천 년 전에는 조개껍데기 하나로 먼 교류를 짐작해야 했다면, 오데소스에서는 항구로 들어온 상품의 흔적이 훨씬 선명해집니다. 바르나는 오래전부터 바깥세계를 향해 열려 있던 도시였습니다.
작은 테라코타 인형에 고대 도시의 얼굴이 남았다

거대한 조각보다 오히려 작은 물건을 좋아한다면 오데소스의 테라코타 소상 앞에서 시간을 조금 더 써도 좋습니다.
구운 흙으로 만든 작은 인물들에는 신과 여성, 일상적인 인물 등 다양한 모습이 등장합니다. 사진 속 인물들을 하나씩 보면 악기를 든 듯한 모습도 있고, 옷자락을 잡거나 몸을 움직이는 자세도 서로 다릅니다.
금으로 만든 왕의 보물은 아니지만 이런 작은 인형이 오히려 도시의 표정을 더 가까이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숭배하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모습의 인간과 신을 친숙하게 여겼는지를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 시대가 되자 신전보다 먼저 생활용품이 눈에 들어온다

오데소스에서 중요하게 숭배된 신 가운데 하나가 아폴론입니다. 박물관에는 신들의 모습이 담긴 조각과 종교 부조, 비문, 건축 부재가 남아 있어 도시의 종교생활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로마 시대 전시에서 신과 영웅만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조금만 시선을 낮추면 훨씬 친숙한 물건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리병과 작은 용기입니다. 향유나 화장품, 약품처럼 적은 양의 액체를 담았을 법한 작은 병들을 보고 있으면 로마 제국이라는 거대한 이름이 갑자기 사람의 일상으로 작아집니다.

그 옆의 테라코타 등잔은 더 친숙합니다. 기름을 넣고 심지에 불을 붙이면 밤을 밝히는 작은 조명이 됩니다.
누군가는 이 불빛 아래에서 식사를 했고, 누군가는 작은 유리병을 열어 향유를 사용했을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는 가족을 위해 묘비를 세웠습니다. 황제와 군단으로 기억되는 로마도 결국 이런 평범한 하루들이 모여 만들어진 세계였습니다.
5. 황금에서 동전과 아이콘까지, 바르나의 시간은 계속된다
동전을 따라가면 도시의 주인이 바뀌는 장면이 보인다

고대 전시를 지나왔다면 이번에는 동전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바르나 고고학 박물관은 2024년 화폐 상설전시를 새롭게 정비해 공개했습니다.
헬레니즘 시대부터 로마와 비잔틴, 중세 불가리아와 유럽, 오스만 시대까지 동전을 차례로 보고 있으면 작은 금속 조각 위의 얼굴과 글자가 계속 바뀝니다. 도시를 지배하는 권력이 바뀔 때마다 돈의 얼굴도 달라진 것입니다.

사진 속 로마 시대 오데소스 동전을 가까이 보세요. 한쪽에는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초상이, 다른 쪽에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와 히기에이아가 등장합니다.
동전은 단순한 돈이 아니었습니다. 누가 통치하는지, 도시가 어떤 신을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사람들의 손바닥 위에서 반복해서 보여주는 작은 매체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1부의 황금과 비교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네크로폴리스의 황금은 극소수의 무덤에 집중되었지만 동전은 시장과 항구를 오가며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습니다. 같은 금속이 한쪽에서는 권력자의 지위를, 다른 쪽에서는 도시가 움직이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천 년이 지나도 사람은 꾸미기를 멈추지 않았다

중세 전시로 넘어가도 금빛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비잔틴과 중세의 금·은 장신구, 피불라와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1부에서 보았던 선사시대 금팔찌를 떠올려보세요.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귀한 재료를 몸에 걸어 자신의 지위와 취향을 표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것도 분명합니다. 중세의 장신구에는 십자가와 기독교적 상징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선사시대 황금이 정확히 어떤 믿음과 연결되었는지 알기 어려운 데 비해, 이제 장신구 자체가 착용자의 신앙을 훨씬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재료는 여전히 금이고 사람은 여전히 자신을 꾸미지만, 금에 새기는 의미는 시대와 함께 달라졌습니다.
마지막에는 아이콘 앞에서 걸음을 조금 늦춰보자
관람의 마지막에는 조금 뜻밖의 공간이 기다립니다. 16~19세기 불가리아 정교회 아이콘 전시입니다.
황금과 무덤에서 출발해 무기와 도기, 동전과 십자가를 따라온 뒤 성인들의 얼굴이 늘어선 공간에 들어서면 박물관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지만 아주 동떨어진 결말은 아닙니다. 처음 보았던 황금도, 중세의 십자가도, 마지막의 아이콘도 결국 사람들이 권력과 믿음, 죽음 뒤의 세계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물건에 담으려 했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관람을 시작했던 43호 무덤을 잠깐 떠올려보세요. 약 7천 년 전 한 남자의 몸 주변에는 수백 점의 황금이 놓여 있었습니다. 그 뒤 수천 년 동안 바르나를 거쳐 간 사람들은 동전에 황제와 신을 새겼고, 몸에는 십자가를 걸었으며, 성인의 모습을 아이콘으로 남겼습니다.
시대도 종교도 도시의 이름도 여러 번 바뀌었지만 한 가지는 꽤 끈질기게 남았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물건에 남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르나 고고학 박물관에서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은 황금의 무게만은 아닙니다. 약 7천 년 전부터 이어진 사람들이 무엇을 귀하게 여기고,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한 건물 안에서 차례로 만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바르나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황금이지만, 그 황금에서 시작된 인간의 이야기는 놀라울 만큼 지금과 닮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