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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스크에서 벨라루스 국립미술관에 들어서면 먼저 금빛 배경의 오래된 성화와 낯선 얼굴들이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이곳에서는 중세와 근세의 종교미술부터 귀족의 초상화, 19세기 벨라루스 회화까지 긴 미술의 흐름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이번 관람은 수백 년을 견뎌낸 성화에서 시작해 꽃과 과일을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그린 이반 흐루츠키, 그리고 19세기의 끝에서 풍경에 새로운 감정을 불어넣은 페르디난트 루슈치츠까지 이어집니다.
그림을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성인의 얼굴은 왜 생각보다 친근한지, 귀족은 왜 그토록 화려하게 자신을 그려두었는지, 평범한 과일과 시골길은 언제부터 그림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오래된 작품 사이를 걷다 보면 벨라루스 미술이 지나온 시간이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1. 금빛 성화 속에서 벨라루스 미술의 얼굴을 만나다

가장 오래된 작품들이 있는 곳부터 시작해보겠습니다. 벨라루스 국립미술관에는 12세기부터 18세기 말까지 이어지는 고대 벨라루스 미술 컬렉션이 약 120점 있습니다. 성화뿐 아니라 프레스코 조각, 목조 조각, 초상화, 직물과 금속공예까지 포함된 중요한 컬렉션입니다.
여기서 성화를 볼 때 한 가지는 잠시 내려놓아도 좋습니다. 얼마나 실제 사람처럼 잘 그렸는가를 따지는 눈입니다. 성화의 목적은 현실을 사진처럼 재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를 그리고 있는지, 어떤 색과 몸짓을 사용했는지,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이 무엇을 기억하고 기도하도록 만드는지가 더 중요했습니다.
엄숙한 성화인데 얼굴은 이상할 만큼 따뜻하다

먼저 16세기 중엽에서 후반에 제작된 《성 파라스케바 프리아트니차》를 보겠습니다. 붉은 마포리온을 걸친 성녀가 정면을 바라보고 오른손에는 십자가, 왼손에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습니다.
구도만 보면 상당히 엄격합니다. 그런데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분위기가 조금 달라집니다. 위압적인 초월자의 얼굴이라기보다 우리가 어딘가에서 실제로 만났을 법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이 지점이 벨라루스 성화를 재미있게 보는 단서입니다. 비잔틴 성화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러시아와 서유럽 미술의 요소가 함께 스며들었고, 성인의 얼굴에는 점차 인간적인 표정이 나타납니다. 여러 문화권이 만나는 벨라루스의 지리적 위치가 작은 성화 한 점 안에서도 보이는 것입니다.
1649년, 화가의 이름이 그림 속에 남다


조금 더 걸어가면 표트르 예브세예비치의 《성모 탄생》을 만날 수 있습니다. 1649년에 제작된 작품으로, 전쟁과 소장품의 이동을 견디고 살아남은 벨라루스 성화의 중요한 사례입니다.
성화라고 하면 한 명의 성인이 정면을 바라보는 단순한 화면을 먼저 떠올리기 쉽지만, 이 작품에서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인물과 건축, 실내 공간이 한 화면 안에 들어오면서 종교적인 사건이 하나의 장면처럼 읽힙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제작자의 이름과 제작 시기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름 없는 장인의 작품으로 남은 성화가 많은 시대에 화가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작품의 무게가 달라집니다.
성인보다 동네 어른처럼 보이는 예언자

그리고 이곳에서 그냥 지나치기 아까운 작품이 1668년의 《예언자 엘리야》입니다.
성경 속 엘리야는 결코 온화한 인물만은 아닙니다. 우상 숭배에 맞서고 왕에게도 거침없이 경고했던 강렬한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이 성화 속 얼굴을 보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인간적인 온기입니다. 길게 늘어진 수염과 주름진 얼굴 때문에 엄숙하기는 하지만, 너무 먼 세계의 존재처럼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17세기 벨라루스 성화의 매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친근함입니다. 성스러운 존재를 그리면서도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사람의 얼굴과 표정을 끌어들였습니다. 신앙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당시 사람들의 얼굴을 어렴풋이 상상하게 만드는 그림입니다.
성모의 옷자락을 따라 동서양의 미술이 만나다


15~16세기 초의 《성모 오디기트리아》와 《스몰렌스크의 성모 오디기트리아》도 함께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디기트리아는 성모가 아기 예수를 안고 한 손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오랜 도상입니다.
같은 도상이 여러 지역과 시대에 반복되었지만 똑같은 그림은 아닙니다. 얼굴의 표현과 옷주름, 장식, 색채를 비교하다 보면 비잔틴에서 출발한 오래된 형식이 동유럽 각 지역에서 조금씩 다른 얼굴을 얻어가는 과정이 보입니다.

여기에 《생명의 샘 성모》도 기억해둘 만합니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에 제작된 작품으로, 나무판 위에 템페라로 그렸습니다. 성모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인물과 상징이 풍성하게 펼쳐져 있어 초기의 엄격한 성화와 비교하면 화면이 훨씬 복잡하고 화려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림 밖으로 걸어나온 성상

성화가 벽 위의 이미지였다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그 종교적 장면을 실제 공간으로 끌어냅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그리스도의 몸은 갈비뼈와 가라앉은 복부, 아래로 숙인 얼굴을 비교적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화려한 극적 효과보다 고통스러운 몸의 무게가 조용히 전달되는 작품입니다.
이 조각은 현재 벨라루스 국립미술관 소장품으로, 소장 이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924년 므스치슬라우 교회역사박물관에서 당시 벨라루스 국립박물관으로 이관된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제작 시기는 과거보다 늦은 16세기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성화와 이런 목조 성상을 함께 바라보면 당시 교회가 그림만 걸어둔 공간이 아니었다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회화와 조각, 직물과 금속 장식이 한데 어우러진 공간 속에서 이 성상은 지금보다 훨씬 강한 존재감을 가졌을 것입니다.
2. 라지비우 가문의 초상화와 슬루츠크 허리띠, 권력도 아름다움을 입는다
성인들의 세계를 지나면 갑자기 사람들이 달라집니다. 후광 대신 모자를 쓰고, 성경 대신 칼이나 지팡이를 들고, 값비싼 옷과 장신구를 걸친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구원을 기다리는 성인이 아니라 자신의 지위와 혈통을 보여주고 싶었던 현실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벨라루스 국립미술관이 보유한 라지비우 가문 관련 초상화는 당시 귀족 사회를 들여다보는 흥미로운 창입니다.
초상화는 귀족들의 오래된 프로필 사진이었다

유리 1세 라지비우의 초상 앞에서는 얼굴만 보지 말고 옷과 자세도 함께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오늘날 사진 한 장을 찍을 때도 옷과 배경을 고르듯, 귀족 초상화에서는 화면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요소가 신분을 설명합니다.
라지비우 가문은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명문가였습니다. 네스비시 성에 있던 가문의 초상화 갤러리는 한때 약 천 점에 이르렀다고 전해집니다. 미술관에 남아 있는 초상들은 단순한 가족사진이 아니라 가문의 역사와 권력을 시각적으로 기록한 거대한 족보의 일부였습니다.
왕의 얼굴도 결국 하나의 정치적 이미지였다

18세기로 내려오면 유제프 헤스키가 1783년에 그린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의 초상》이 기다립니다.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마지막 국왕이었습니다.
왕의 초상화에서 표정만 보는 것은 절반만 보는 것입니다. 옷감의 광택과 훈장, 자세, 화면 속 소품까지 모두 권위를 만드는 장치입니다. 사진과 방송이 없던 시대에는 이런 초상화가 군주의 얼굴을 널리 알리는 중요한 매체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이 인물은 곧 사라질 국가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화려한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그 뒤에 기다리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몰락을 떠올리면 그림의 분위기가 조금 다르게 읽힙니다.
남자의 허리에 두른 몇 미터의 사치품


이제 그림에서 잠시 눈을 떼고 직물을 보겠습니다. 벨라루스 옛 공예를 대표하는 물건 가운데 하나인 슬루츠크 허리띠입니다.
이름 때문에 오늘날의 가죽 벨트 정도를 떠올리면 실물을 보았을 때 꽤 놀랄 수 있습니다. 길고 넓은 직물에 복잡한 꽃과 식물 문양이 이어지고, 고급품에는 금속사가 사용되었습니다. 18세기 귀족 남성들이 콘투시 같은 전통 복식 위에 둘렀던 화려한 장신구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동양에서 건너온 사치품의 취향이 현지에서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점입니다. 페르시아와 오스만 직물에 대한 동경에서 출발한 허리띠가 슬루츠크의 공방에서 제작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 문화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조금 전 초상화 속 귀족들의 옷을 유심히 보았다면 이 직물이 더욱 재미있습니다. 그림 속에서 신분을 표현하던 패션이 진열장 안에서는 실제 물건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3. 과일 한 알까지 눈을 붙잡다, 이반 흐루츠키의 정물화
이제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성인도 왕도 귀족도 잠시 자리를 비웁니다. 대신 포도와 복숭아, 레몬과 꽃이 화면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사람보다 과일이 더 화려합니다.
이반 흐루츠키의 그림 앞에서는 과일 하나를 오래 바라보게 됩니다. 포도알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투명하고, 복숭아에는 보송보송한 표면이 느껴지며, 유리잔에는 빛이 번쩍입니다. 꽃잎과 잎사귀에는 작은 흠집까지 보입니다.
먹기 전에 눈으로 먼저 맛보는 그림

1839년의 《정물: 과일과 꽃》은 흐루츠키의 장기를 한눈에 보여줍니다. 정물화라는 말 때문에 조용한 그림을 예상했다면 실제 화면은 상당히 풍성합니다.
꽃은 위로 솟아오르고 과일은 화면 아래에 넘칠 듯 놓여 있습니다. 매끈한 포도와 거친 껍질, 투명한 유리와 부드러운 꽃잎처럼 서로 다른 질감을 한 화면에 모아놓았기 때문에 눈이 계속 움직입니다.
정물화가 재미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움직이는 사람 하나 없는데 화가는 자신의 솜씨를 숨길 곳이 없습니다. 포도가 포도처럼 보이고 유리가 유리처럼 느껴지게 만들어야 합니다. 흐루츠키는 이 까다로운 게임을 무척 즐겼던 화가 같습니다.
꽃과 과일 옆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런데 1838년 작품 《꽃과 과일을 든 미지의 여인의 초상》에서는 더욱 재미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흐루츠키가 잘하던 정물화와 인물화가 한 화면에서 만납니다.
여인이 꽃과 과일 옆에 자리하고 있지만 어느 쪽이 주인공인지 쉽게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얼굴과 옷을 보다가도 어느 순간 포도와 복숭아로 시선이 내려가고, 다시 꽃을 따라 올라가다 인물의 얼굴과 만납니다.
그림의 제목에 이름이 남지 않았다는 것도 묘한 여운을 줍니다. 모델의 이름은 사라졌지만 얼굴과 옷, 그녀 곁에 놓인 꽃과 과일은 18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왔습니다. 그리고 이 작품은 흐루츠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되어 지금도 민스크에 남아 있습니다.
촛불 하나가 정물화의 시간을 바꾸다

《과일과 촛불》에서는 분위기가 조금 차분해집니다. 여전히 탐스러운 과일이 놓여 있지만 그 옆에 촛불이 등장합니다.
정물화에서 촛불은 꽤 의미심장한 물건입니다. 타오르는 순간부터 짧아지고 결국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싱싱한 과일과 꽃 역시 언젠가는 시들고 썩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가장 화려하게 그려놓은 화면에 시간의 흔적이 슬쩍 들어온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그림을 반드시 무거운 죽음의 상징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흐루츠키의 관심은 무엇보다 빛과 표면, 물건이 가진 촉감에 있었습니다. 촛불은 상징이면서 동시에 주변 사물의 질감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훌륭한 조명 장치이기도 합니다.
장미와 과일, 같은 소재를 다시 그리는 이유

1839년의 《장미와 과일》에서도 흐루츠키 특유의 풍성한 구성이 이어집니다. 현대 관람객에게는 비슷한 정물화를 왜 여러 장 그렸을까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꽃과 과일을 정교하게 그린 정물화는 상당한 인기를 누렸습니다. 흐루츠키 역시 성공한 구도를 조금씩 변화시키며 여러 작품을 제작했습니다. 같은 소재라도 꽃의 종류와 배치, 과일의 위치, 빛이 떨어지는 방향이 달라지면 그림 전체의 리듬도 달라집니다.
비슷한 그림을 나란히 놓고 다른 부분을 찾아보는 것도 흐루츠키를 감상하는 재미입니다. 미술관에서는 때때로 명작 한 점보다 같은 화가의 여러 작품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화가가 무엇을 반복했고 무엇을 바꾸었는지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자 생활이 보이기 시작했다

1854년의 《사냥한 새와 토끼, 채소와 버섯》에서는 소재가 크게 달라집니다. 우아한 꽃병 대신 사냥한 동물과 채소, 버섯이 등장합니다.
오늘날의 눈에는 다소 낯설 수 있지만 사냥감은 유럽 정물화에서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소재입니다. 깃털, 털, 채소 껍질, 버섯처럼 전혀 다른 표면을 한꺼번에 그릴 수 있으니 화가에게는 자신의 관찰력과 묘사력을 보여주기 좋은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초기의 화려한 꽃과 과일 그림과 나란히 보면 더욱 흥미롭습니다. 같은 화가가 매끈한 포도알에서 거친 새의 깃털까지 얼마나 집요하게 사물의 표면을 관찰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정물화의 화가가 자신의 집 안으로 들어가다

흐루츠키를 과일 잘 그리는 화가로만 기억하고 떠나면 조금 아쉽습니다. 1854~1855년의 《화가의 저택 방에서, 이젤 앞의 아이들》을 보면 전혀 다른 흐루츠키가 나타납니다.
화면에는 화려하게 연출된 과일 대신 실내와 아이들이 등장합니다. 화가가 살았던 자하르니치 저택의 생활공간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정물화에서 사물 하나하나를 꼼꼼히 관찰하던 눈은 이제 가구와 그림, 옷과 실내의 빛을 기록합니다.
덕분에 우리는 유명 화가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동시에 19세기 어느 집의 문을 살짝 열어본 듯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미술이 역사 자료가 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쯤에서 흐루츠키의 전시실을 한 번 돌아보면 처음 만났던 성화와는 정말 먼 곳까지 온 것처럼 느껴집니다. 금빛 배경 앞에서 정면을 바라보던 성인은 사라졌고, 꽃과 과일, 촛불과 아이들처럼 일상의 사물이 화면의 중심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생각하면 두 세계 사이에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성화를 그린 이름 모를 화가도, 흐루츠키도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오래 남기려 했습니다. 한쪽에는 신앙의 세계가, 다른 한쪽에는 눈앞의 사물과 생활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 시선은 집 안을 빠져나와 숲과 들판, 강과 하늘로 향합니다.
4. 숲과 들판이 그림의 주인공이 되다, 19세기 벨라루스의 풍경
흐루츠키의 그림에서 과일과 꽃을 실컷 들여다보았다면 이제 창밖으로 나가볼 차례입니다. 19세기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벨라루스 미술에서는 숲과 강, 들판과 시골길처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점점 중요한 주제가 됩니다.
그 중심에 아폴리나리 고라프스키(Apollinary Goravsky, 1833~1900)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흐루츠키보다 이름이 덜 알려져 있지만, 벨라루스의 19세기 풍경화를 이야기할 때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화가입니다.
고라프스키의 그림에는 거대한 산맥이나 이국적인 폐허가 자주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강물이 흐르고 길이 이어지고, 나무가 자라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풍경이 펼쳐집니다. 처음에는 평범해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평범함이 중요합니다. 특별한 명승지가 아니어도 자신이 살아가는 땅이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시선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길 하나를 따라가면 19세기 벨라루스가 나타난다

1853년의 《강과 길이 있는 풍경》 앞에서는 제목 그대로 강과 길부터 찾아보는 것이 좋습니다.
화면 속 길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우리의 눈을 그림 안쪽으로 끌고 들어가는 안내자입니다. 길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면 나무와 들판을 지나 강과 하늘로 이어집니다. 그림 앞에 서 있는데 어느새 풍경 속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입니다.
고라프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미술아카데미에서 공부했습니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배운 탄탄한 원근법과 구성은 그의 풍경에서도 드러납니다. 하지만 기술만 보여주는 그림은 아닙니다. 잘 정돈된 화면 안에 자신이 알고 있던 동유럽의 자연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볼 때는 멋진 풍경을 찾기보다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본다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170여 년 전 누군가 실제로 걸었을 법한 길이 지금도 그림 속에서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풍경 속에 사람들이 들어오자 그림이 생활이 되었다

1858년의 《목욕하는 사람들》에서는 자연만 바라보던 시선이 사람에게로 조금 이동합니다.
강과 나무가 펼쳐진 풍경 속에 사람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러나 인물들이 화면 전체를 장악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 속에 작은 존재로 놓여 있습니다. 사람이 풍경을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이런 그림을 보면 당시의 자연이 단순히 감상의 대상만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떠올리게 됩니다. 강은 사람들이 오가고 쉬고 생활하는 공간이었고, 숲과 들판 역시 일상의 일부였습니다.
미술관에서 오래된 풍경화를 보는 재미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화가는 자연을 그렸는데, 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안에 담긴 생활까지 역사 자료가 됩니다.
평범한 시골이 한 폭의 풍경이 되다

고라프스키의 풍경화가 매력적인 이유는 반드시 극적인 장소를 찾아다니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시골 풍경》에서도 특별한 사건보다 나무와 들판, 농촌의 작은 집들이 어우러진 평범한 풍경이 화면의 주인공이 됩니다.
그런데 잠시 그림 앞에 머물러 보면 평범하다는 말이 무색해집니다. 나무마다 조금씩 다른 녹색을 사용하고,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갈수록 색과 형태를 부드럽게 흐리면서 넓은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데 그치지 않고, 빛과 공기까지 그림 속에 붙잡아 두려 했던 화가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웅장한 산이나 이름난 명승지가 없어도 풍경화는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고라프스키에게 중요한 것은 어디를 그렸느냐보다 익숙한 자연을 얼마나 오래 바라보았느냐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의 그림에서는 19세기 벨라루스의 평범한 시골이 오히려 오래 기억되는 풍경으로 남습니다.
하루가 저물면 풍경의 표정도 달라진다

1870년대의 《민스크 지방의 저녁》에서는 고라프스키의 풍경이 한층 조용해집니다.
저녁은 풍경화가에게 묘한 시간입니다. 낮의 선명한 형태는 조금씩 흐려지고 빛의 색은 빠르게 변합니다. 사물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묘사하기보다 공간 전체의 분위기가 중요해지기 시작합니다.
그림에는 유명한 건축물도, 거대한 사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루가 저물어가는 평범한 풍경만으로 충분합니다. 오히려 그런 장면이기에 당시 이 땅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바라보았던 하늘을 우리도 함께 보고 있다는 느낌이 강해집니다.
손에 든 팔레트가 그녀에 대해 말해주는 것

고라프스키가 풍경만 그렸다고 생각할 무렵 《팔레트를 든 미지의 여인의 초상》을 만나면 꽤 반갑습니다.
1867년에 제작된 이 작품에서 여인은 팔레트와 붓을 들고 있습니다. 이름은 전해지지 않지만 적어도 화가는 그녀를 단순히 아름다운 여성으로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단서를 화면 안에 분명히 남겼습니다.
오래된 초상화에서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종종 얼굴만큼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군인에게는 무기가, 학자에게는 책이 등장하듯 이 여성에게는 팔레트가 있습니다. 이름을 잃어버린 인물에게 그림 속 작은 물건 하나가 정체성의 일부를 돌려주는 셈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그녀가 무엇을 하던 사람이었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클로버가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

1890년대에 이르면 고라프스키는 훨씬 소박한 자연에도 눈을 돌립니다. 《꽃 핀 클로버》에서는 특별한 명승지가 아니라 풀과 들판 자체가 화면의 중심으로 올라옵니다.
생각해보면 꽤 큰 변화입니다. 과거의 미술에서 중요한 그림의 주인공은 성인과 왕, 귀족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전시실만 떠올려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제 화가는 길가와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을 진지하게 바라봅니다.
클로버가 위대한 식물이어서가 아닙니다. 화가가 바라보았기 때문에 평범한 자연도 그림이 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그렸느냐보다 어떻게 바라보았느냐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한 화가의 마지막 풍경에서 달라진 시선을 발견하다

1897년의 《풍경》까지 오면 1853년의 《강과 길이 있는 풍경》과 한번 비교해보고 싶어집니다.
두 작품 사이에는 40년이 넘는 시간이 놓여 있습니다. 젊은 화가가 화면을 치밀하게 구성하며 자연을 바라보던 시기에서, 오랫동안 풍경을 그려온 화가가 자연의 분위기를 받아들이는 시기까지 한 사람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미술관에서 같은 화가의 작품을 여러 점 보는 것이 좋은 이유도 이것입니다. 한 점만 보면 작품을 보지만 여러 점을 이어서 보면 화가의 시간이 보입니다.
그리고 이제 19세기도 거의 끝났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전시실에서 풍경은 한 번 더 변합니다. 눈앞에 있는 자연을 충실히 기록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화가의 감정까지 짙게 품기 시작합니다.
5. 한 세기의 끝에서 풍경이 감정이 되다, 페르디난트 루슈치츠
마지막으로 만나볼 화가는 페르디난트 루슈치츠(Ferdynand Ruszczyc, 1870~1936)입니다.
여기까지 걸어오면서 우리는 꽤 긴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금빛 성화 속 성인에서 출발해 귀족의 초상화를 만났고, 흐루츠키의 포도와 복숭아를 들여다본 뒤 고라프스키의 길을 따라 숲과 강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루슈치츠 앞에 도착하면 풍경을 바라보는 방식이 다시 달라집니다. 자연은 더 이상 눈앞에 펼쳐진 장소만이 아닙니다. 하늘과 나무, 건물과 땅이 사람의 감정을 대신 말하기 시작합니다.
교회보다 먼저 하늘을 보게 되는 그림

1899년의 《교회 근처》는 이번 관람의 마지막 작품으로 아주 잘 어울립니다.
제목에는 분명 교회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화면의 주인공일 것 같지만 실제 그림 앞에서는 시선이 자연스럽게 주변의 풍경으로 퍼집니다. 건물과 나무, 땅과 하늘이 서로 맞물리면서 특정 장소를 묘사한 풍경 이상의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루슈치츠가 살았던 19세기 말의 동유럽 미술에서는 자연을 정확하게 재현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는 화가들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실제 풍경을 출발점으로 삼되 색과 구도, 빛을 통해 자신이 느낀 정서까지 화면에 담으려 했습니다.
그래서 루슈치츠의 풍경에는 묘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아름답지만 마냥 평온하지 않고, 익숙한 시골 풍경처럼 보이면서도 어딘가 극적인 기운이 감돕니다.
고라프스키의 길과 루슈치츠의 풍경은 무엇이 다를까
여기서 잠시 고라프스키의 1853년작 《강과 길이 있는 풍경》을 떠올려보겠습니다.
고라프스키의 길을 바라볼 때는 그곳을 실제로 걸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디에서 길이 시작되고 어느 방향으로 이어지는지 눈으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자연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화면 안에 질서 있게 옮기려는 화가의 시선이 느껴집니다.
루슈치츠에게 오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이곳은 어떻게 생겼을까가 아니라, 이곳에 서 있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불과 몇십 년 사이에 풍경화가 향하는 곳이 달라진 것입니다. 눈으로 본 자연에서 마음으로 받아들인 자연으로 시선이 이동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변화가 19세기의 끝에서 20세기 미술로 넘어가는 중요한 징검다리가 됩니다. 이번 관람을 여기에서 멈추는 이유도 분명합니다. 이후의 작품으로 더 나아가기보다, 오래된 벨라루스 미술이 어디까지 걸어왔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지점에서 잠시 멈춰보는 것입니다.
성인의 얼굴에서 시작한 여행이 한 조각의 하늘에서 끝나다
이제 처음 들어왔던 전시실을 잠시 떠올려보겠습니다.
그곳에는 금빛 배경 앞에 성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림의 중심에는 신앙이 있었고, 화가는 오래된 규칙과 상징을 따라 성스러운 세계를 보여주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그림 속으로 왕과 귀족이 들어왔습니다. 옷과 장신구, 자세와 표정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흐루츠키는 꽃과 과일을 화면 한가운데 올려놓았습니다. 포도 한 알과 유리잔 하나도 그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고라프스키는 화실 밖으로 걸어나갔습니다. 강과 시골길, 들판을 바라보았습니다. 마지막에 만난 루슈치츠는 그 풍경에 자신의 감정까지 실어 보냈습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벨라루스 국립미술관의 오래된 컬렉션은 단순히 옛 그림을 시대순으로 늘어놓은 공간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바라보았는지가 수백 년 동안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긴 이야기처럼 읽힙니다.
처음에는 하늘의 존재를 그렸고, 다음에는 권력을 가진 사람을 그렸습니다. 그러다 식탁 위의 과일과 이름 없는 사람, 평범한 시골길과 들판도 그림에 들어왔습니다. 마침내 화가는 눈앞의 풍경을 통해 자신의 마음까지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미술관에서는 유명한 화가의 이름을 몇 개 기억하는 것보다 한 작품에서 다음 작품으로 시선이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따라가 보는 편이 재미있습니다.
16세기의 성녀 파라스케바와 1899년 루슈치츠의 풍경 사이에는 300년이 넘는 시간이 놓여 있습니다. 두 작품은 전혀 달라 보이지만 결국 같은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을 어떻게 그림으로 남겨왔을까.
그 질문 하나를 가지고 전시실을 걷다 보면 낯설었던 벨라루스 미술도 어느 순간 꽤 가까운 이야기가 됩니다. 오래된 성화의 얼굴에서 시작했던 관람은 그렇게 19세기 마지막 하늘 아래에서 조용히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