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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헐의 괴물, 루벤스의 격렬한 움직임, 앙소르의 가면. 벨기에 왕립미술관(Royal Museums of Fine Arts of Belgium)에서는 수백 년의 미술사가 꽤 극적인 장면들로 이어집니다.
연도와 화파부터 외울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은 그림 속에서 이상한 것 하나만 먼저 찾아보겠습니다. 괴물을 발견하고, 눈밭에 숨은 주인공을 찾고, 루벤스의 화면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플랑드르 미술에서 프랑스 혁명까지 와 있을 겁니다.

1. 브뤼헐 앞에서는 먼저 괴물부터 찾아보세요
《반역 천사의 추락》, 천국에서 벌어진 거대한 추락 사고

피터르 브뤼헐 1세(Pieter Bruegel the Elder)의 《반역 천사의 추락(The Fall of the Rebel Angels)》 앞에서는 처음부터 그림 전체를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화면 아래쪽에서 마음에 드는 괴물 하나를 고르는 것부터 시작해보세요.
물고기인지 새인지 정체를 결정하기 어려운 녀석이 있고, 곤충과 갑각류를 한 몸에 욱여넣은 듯한 존재도 있습니다. 사람 얼굴을 달고 있으면서 몸은 전혀 엉뚱한 생물도 튀어나옵니다. 하나를 발견하고 안심할 틈도 없이 바로 옆에서 더 괴상한 것이 기다립니다.

이 난장판의 중심에는 의외로 질서정연한 인물이 있습니다. 갑옷을 입은 대천사 미카엘입니다. 1562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미카엘과 천사들이 신에게 반역한 천사들을 천국에서 몰아내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화면 위쪽에는 아직 천상의 질서가 남아 있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추락한 존재들이 기괴한 생명체로 뒤엉킵니다.
여기서 브뤼헐의 상상력이 폭발합니다. 물고기와 곤충, 새와 갑각류, 식물과 생활도구를 떠올리게 하는 형태가 괴물들의 몸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생물을 발명했다기보다 현실에서 본 것들을 잘게 분해한 뒤 엉뚱한 방식으로 다시 조립한 느낌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엄숙한 종교화인데도 관람 방식은 뜻밖에 유쾌합니다. 미카엘을 한 번 찾고 나면 자꾸 아래쪽이 궁금해집니다. “이번에는 뭘 합쳐서 이런 걸 만들었지?” 하고 괴물을 하나씩 찾아다니다 보면 16세기 종교화가 어느 순간 판타지 생물 도감으로 변합니다.
《베들레헴의 인구조사》, 주인공을 찾기가 이렇게 어려운 성경화라니
괴물들을 겨우 빠져나왔더니 이번에는 눈 덮인 마을입니다. 브뤼헐의 《베들레헴의 인구조사(The Census at Bethlehem)》입니다.

제목을 가리고 보여준다면 성경화라고 맞히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장작을 나르는 사람, 짐을 옮기는 사람, 얼음 위에서 노는 아이들이 보이고 여관 앞은 사람들로 북적입니다. 베들레헴보다는 브뤼헐이 살던 16세기 플랑드르의 어느 겨울 마을에 훨씬 가까워 보입니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의 주인공도 분명히 와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문제는 주인공 대접을 거의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목수의 도구를 지니고 걸어가고, 임신한 마리아는 당나귀를 타고 뒤따릅니다. 알고 찾아도 금세 지나칠 만큼 작습니다.
이게 브뤼헐답습니다. 성경의 핵심 인물을 화면 중앙에 크게 세워 후광까지 둘러주는 대신, 세금을 내고 장작을 나르고 아이들이 노는 평범한 하루 속에 섞어버렸습니다. 거대한 역사가 벌어지는 순간에도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하루를 살아간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마리아와 요셉을 찾았다고 그림을 떠나지는 마세요. 얼음 위의 아이들을 보고, 불을 쬐는 사람에게 갔다가, 수레와 동물을 따라 다시 마을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브뤼헐의 그림에는 주연 한 명보다 단역 수십 명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새 덫이 있는 겨울 풍경》, 아름다운 겨울날에 덫 하나가 놓여 있다

이번에는 정말 겨울 풍경을 편하게 즐겨도 될 것 같습니다. 《새 덫이 있는 겨울 풍경(Winter Landscape with Skaters and Bird Trap)》에는 얼어붙은 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이 있고, 멀리 교회와 집들이 눈 속에 잠겨 있습니다. 그대로 크리스마스 카드에 넣어도 될 만큼 평화롭습니다.
그런데 브뤼헐이 제목에 굳이 넣은 것은 아름다운 설경이 아니라 화면 오른쪽 아래의 조그만 새 덫입니다.
나무판으로 만든 덫 주변에 새들이 먹이를 찾아 모여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얼음 위에서 신나게 놀고, 바로 옆에서는 새들이 위험을 모른 채 덫 주변을 맴돕니다. 평화로운 겨울날에 아주 작은 긴장 하나가 끼어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림의 새 덫과 얼음은 삶의 불안정함이나 예기치 않은 위험을 암시한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다만 브뤼헐이 우리에게 정답표를 남긴 것은 아닙니다. 꼭 거창한 교훈을 찾지 않더라도 즐거움과 위험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웃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림은 충분히 묘합니다.
세 작품을 지나고 나면 브뤼헐을 보는 요령이 생깁니다. 천상의 전쟁에서는 괴물이 더 궁금하고, 성경화에서는 이름 없는 마을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며, 겨울 풍경에서는 손바닥만 한 새 덫이 자꾸 신경 쓰입니다. 브뤼헐의 그림에서는 중심을 봤다면 그다음엔 반드시 구석을 보세요. 진짜 이야기가 거기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2. 루벤스를 만나면 그림에 갑자기 속도가 붙는다
《갈보리로 가는 길》,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브뤼헐의 화면 구석을 한참 들여다보다 루벤스(Peter Paul Rubens) 앞으로 오면 눈의 사용법부터 바꿔야 합니다. 조금 전까지는 작은 인물을 찾아다녔다면 이제는 그림 전체가 먼저 달려듭니다.
《갈보리로 가는 길(The Road to Calvary)》에서 그리스도는 무거운 십자가 아래 쓰러져 있고 병사와 군중이 사방에서 몰려듭니다. 그런데 인물들을 하나씩 보면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몸을 숙이고, 팔을 뻗고, 고개를 돌리고, 서로 다른 방향으로 힘을 씁니다.
여기에 십자가까지 비스듬히 화면을 가릅니다. 사람의 몸과 팔, 옷자락, 십자가가 만든 사선들이 서로 이어지면서 눈은 한곳에 머물 틈이 없습니다. 그림은 정지해 있는데 관람객의 시선은 계속 움직입니다.
바로크의 '역동성'이라는 말을 교과서에서 외우는 것보다 이 작품 앞에 한 번 서는 편이 빠릅니다. 브뤼헐이 “한번 찾아보시죠”라고 권한다면, 루벤스는 “놓치지 말고 따라오세요”라며 관람객의 시선을 끌고 가는 화가입니다.
《흑인 남성의 머리 네 습작》, 거장의 작업실을 슬쩍 들여다보다

거대한 종교화 다음에는 완성작이 아니라 루벤스의 작업 과정을 들여다보겠습니다. 《흑인 남성의 머리 네 습작(Four Studies of the Head of a Moor)》에는 한 남성의 얼굴이 네 번 등장합니다.
같은 사람인데 고개를 조금 돌리는 것만으로 인상이 달라집니다. 어느 얼굴에서는 이마와 광대에 빛이 닿고, 다른 얼굴에서는 눈과 볼이 그림자 속으로 들어갑니다. 루벤스는 '사람의 얼굴은 이렇게 생겼다'고 외워서 그린 것이 아니라 빛과 각도가 얼굴을 어떻게 바꾸는지 직접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루벤스의 작업실은 수많은 주문을 소화하는 대규모 공방이었습니다. 화가는 이런 머리 습작을 만들어두고 대형 작품 속 인물을 구성할 때 활용했습니다. 오늘날식으로 비유한다면 완성된 종교화가 본 공연이고, 이 습작은 배우의 표정과 조명을 미리 확인해보는 카메라 테스트에 가깝습니다.
이 작품을 보고 나면 거장의 대작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수십 명이 뒤엉킨 화려한 화면 역시 출발점에는 한 사람의 얼굴을 이쪽으로 돌려보고 저쪽으로 돌려보는 집요한 관찰이 있었습니다.
《마라의 죽음》, 욕조에서 일어난 암살이 혁명의 아이콘이 되다
이제 시간을 훌쩍 건너 1793년 프랑스 혁명의 한복판으로 가보겠습니다. 기다리고 있는 작품은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마라의 죽음(The Death of Marat)》입니다.

전시실에서 마주하면 의외로 조용한 그림입니다. 프랑스 혁명의 급진파 정치인이자 언론인이었던 장폴 마라(Jean-Paul Marat)가 욕조 안에서 축 늘어져 있습니다. 한 손에는 편지가 남아 있고 바닥에는 칼이 떨어져 있습니다.

마라는 피부 질환 때문에 욕조에 몸을 담근 채 업무를 보곤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793년 7월 13일, 그를 찾아온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가 바로 이곳에서 마라를 칼로 찔러 살해했습니다.
실제 암살 현장은 그림처럼 고요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다비드는 놀랄 만큼 많은 것을 치워버렸습니다. 복잡한 실내는 거의 사라졌고 배경은 텅 비었습니다. 피도 절제했습니다. 대신 마라의 몸에는 부드러운 빛이 내려앉고, 팔은 힘없이 욕조 밖으로 떨어집니다.
왜 이렇게 그렸을까요? 다비드는 마라와 정치적으로 가까웠고 프랑스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화가였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범죄 현장의 정확한 재현이 아니라 마라를 어떻게 기억하게 만들 것인가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그림 속 마라는 논쟁적인 정치인보다 자신의 일을 하다 죽은 순교자처럼 보입니다. 축 늘어진 팔과 상처 입은 몸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그린 종교화를 떠올리게 하는 시각적 울림마저 느껴집니다. 정치적 죽음에 종교화의 엄숙함을 빌려온 것입니다.
욕조 옆의 허름한 나무 상자도 그냥 지나치면 아깝습니다. 대리석 기념비 대신 평범한 상자를 놓고 그 위에 “À Marat, David”, 즉 ‘마라에게, 다비드’라고 적었습니다. 가구 하나가 순식간에 묘비가 됩니다.
여기서 《마라의 죽음》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가 보입니다. 그림은 사건을 단순히 기록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지우느냐에 따라 한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까지 바꿀 수 있습니다. 18세기의 회화인데도 오늘날 정치 포스터나 캠페인 이미지, 보도사진을 보는 우리의 경험과 묘하게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브뤼헐은 화면 곳곳에 이야기를 숨겼고, 루벤스는 관람객의 시선을 움직였으며, 다비드는 현실의 사건을 하나의 강력한 이미지로 다시 설계했습니다. 이제 다음 시대로 넘어가면 그림은 바깥세상에서 조금씩 사람의 안쪽으로 향합니다. 기억과 가면, 고독과 욕망처럼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것들이 화면에 등장할 차례입니다.
3. 19세기 말, 화가들이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페르낭 크노프 《추억》, 여자 일곱 명인데 모델은 한 명이다

1부의 《마라의 죽음》까지 화가들은 성경과 역사, 실제 사건처럼 바깥세상에서 이야기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접어들면 시선이 슬며시 사람의 안쪽으로 향합니다. 기억과 불안, 고독처럼 손으로 가리킬 수 없는 것이 그림의 주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 변화가 가장 우아하게 드러나는 작품이 페르낭 크노프(Fernand Khnopff)의 《추억(Memories / Du lawn tennis)》입니다. 잔디밭에 일곱 여성이 서 있고 테니스 라켓도 보입니다. 얼핏 보면 운동을 마친 친구들이 단체사진을 찍는 장면 같습니다.
그런데 사진치고는 이상합니다. 누구도 서로 이야기하지 않고 시선도 좀처럼 만나지 않습니다. 몸은 같은 잔디밭에 있는데 마음은 일곱 방향으로 흩어진 듯합니다.
여기서 비밀 하나를 알고 보면 더 흥미로워집니다. 일곱 인물은 모두 크노프의 여동생 마르그리트를 모델로 삼았습니다. 크노프는 그녀를 여러 자세로 촬영한 사진을 참고해 한 화면 안에 서로 다른 모습을 배치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실제 어느 오후의 단체사진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서로 다른 순간을 꺼내 한 장소에 다시 모아놓은 장면입니다.
제목이 《테니스 치는 여자들》이 아니라 《추억》이라는 사실도 여기서 의미심장해집니다. 기억도 이와 비슷합니다. 정확한 순서대로 보관되지 않고 어떤 순간은 선명해지는 반면 다른 장면은 흐려지며, 서로 다른 시간이 한 기억 속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크노프는 기억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기억이 작동하는 방식을 그림처럼 펼쳐놓았습니다.
제임스 앙소르 《분노한 가면들》, 얼굴을 가렸더니 속마음이 더 잘 보인다
크노프가 기억 속으로 들어갔다면 제임스 앙소르(James Ensor)는 조금 더 짓궂습니다. 사람의 얼굴부터 믿지 않습니다.
1883년에 그린 《분노한 가면들(The Scandalized Masks / Les Masques scandalisés)》에는 두 인물이 등장합니다. 인원은 둘뿐인데 방 안의 분위기는 웬만한 군중화보다 소란스럽습니다.

가면은 원래 얼굴을 숨기는 물건입니다. 그런데 앙소르에게 가면 정반대로 작동합니다. 표정은 우스꽝스럽게 과장되어 있고 입과 눈은 불편할 만큼 일그러져 있습니다. 얼굴을 감췄는데 공격성과 허영, 심술 같은 감정은 오히려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앙소르에게 가면이 익숙했던 데에는 개인적인 배경도 있습니다. 그가 성장한 오스텐더에서 가족은 기념품 가게를 운영했고, 가게에는 카니발 가면과 조개껍데기, 이국적인 장식품들이 가득했습니다. 어린 시절 가게에서 보던 물건이 훗날 벨기에 근대미술에서 가장 낯선 얼굴 가운데 하나가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면은 화가에게 아주 편리한 장치였습니다. 실제 얼굴을 그리면 특정한 한 사람의 초상이 되지만 가면을 씌우는 순간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습니다. 웃고 있는데 무섭고, 축제 같은데 즐겁지 않으며, 우스운데 오래 보고 있으면 조금 불편합니다.
앙소르가 재미있는 이유가 바로 이 역설에 있습니다. 얼굴을 숨겼는데 사람이 더 적나라해졌습니다. 우리가 사회에서 쓰는 표정도 어쩌면 하나의 가면일 수 있다는 생각까지 가면, 그림은 갑자기 꽤 현대적으로 보입니다.
레옹 스필리아르트 《자화상》, 새벽 세 시의 얼굴을 그림으로 옮긴다면
앙소르의 가면을 벗었다고 안심하기는 이릅니다. 레옹 스필리아르트(Léon Spilliaert)에게 가면 이번에는 얼굴 하나와 어둠만 남습니다.

이 자화상에는 후대에 멋있게 기억되고 싶은 화가의 표정이 없습니다.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유난히 크게 떠 있으며 주변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습니다. 사람을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 먼저 느껴지는 것은 적막입니다.
스필리아르트는 오스텐더의 텅 빈 거리와 해변, 방파제, 어두운 실내를 즐겨 그렸습니다. 밤에 홀로 도시와 해변을 걷던 경험도 그의 작품 세계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그의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고, 바다는 낭만적인 휴양지보다 끝을 알 수 없는 검은 공간에 가깝습니다.
스필리아르트의 그림을 볼 때는 “무엇을 그렸을까?”보다 “내가 저곳에 혼자 있다면 어떤 기분일까?”라고 묻는 편이 더 재미있습니다. 텅 빈 거리, 끝없이 뻗은 방파제, 거울 속 자신의 얼굴. 그는 풍경을 그리면서 동시에 그 풍경 안에 홀로 남겨진 사람의 심리를 그렸습니다.
크노프는 기억을 흔들었고, 앙소르는 얼굴을 의심했으며, 스필리아르트는 고독을 화면에 남겼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그림은 이미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일에 별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아예 현실에 없는 세계를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4. 현실을 벗어나자 신화와 욕망이 화면을 차지했다
장 델빌 《사탄의 보물》, 악마의 보물창고에 금은보화는 없다

장 델빌(Jean Delville)의 《사탄의 보물(The Treasures of Satan)》 앞에서는 제목부터 사람을 낚습니다. 사탄에게 보물이 있다니 금화와 보석이라도 산처럼 쌓여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물상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대신 사탄이 소중하게 거느리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푸른 물속을 연상시키는 공간에서 나체의 인물들이 서로 얽혀 있고, 그 위로 붉은빛의 거대한 사탄이 몸을 휘감듯 움직입니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뿔 달린 악마와도 다릅니다. 길게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유연한 몸 때문에 위협적인데 동시에 이상할 만큼 매혹적입니다.
바로 그 매혹이 중요합니다. 델빌에게 사탄의 '보물'은 금은보화가 아니라 감각과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혀왔습니다. 아름다운 육체와 위험한 유혹을 일부러 같은 화면에 놓았으니, 관람객도 불편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피하고 싶은데 자꾸 보게 됩니다.
크기도 한몫합니다. 높이와 너비가 모두 2미터를 훌쩍 넘는 대작이라 실제 앞에 서면 작은 신화 삽화를 구경하는 느낌이 아닙니다. 관람객 쪽으로 사탄의 세계가 밀려오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1부의 브뤼헐을 떠올려보면 두 화가의 차이가 재미있습니다. 브뤼헐은 현실의 물고기와 곤충, 생활도구를 뒤섞어 괴물이라는 존재를 만들었습니다. 델빌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괴물이 살아도 이상하지 않을 세계 자체를 만들어버립니다.
《죽은 오르페우스》, 잘린 머리를 이렇게 아름답게 그려도 될까

같은 델빌의 그림인데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죽은 오르페우스(The Death of Orpheus)》는 제목만 놓고 보면 《사탄의 보물》보다 훨씬 끔찍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림은 놀라울 만큼 고요합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음악으로 사람과 동물은 물론 저승의 존재들까지 감동시킨 음악가입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비극적입니다. 그는 살해되어 몸이 찢기고, 머리와 리라는 물에 떠내려갑니다.
보통 화가라면 비극의 순간을 극적으로 보여줄 법한데 델빌은 정반대로 갑니다. 오르페우스의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표정이 없습니다. 눈을 감은 모습은 죽었다기보다 깊이 잠든 사람에 가깝고, 주변의 푸른색과 보랏빛은 강물보다 수정이나 보석의 표면처럼 빛납니다.
여기서 상징주의가 좋아한 질문 하나가 나타납니다. 육체가 사라지면 예술도 함께 사라질까?
델빌은 끔찍한 죽음을 그대로 재현하는 대신 오르페우스를 육체의 죽음을 넘어선 예술과 정신의 상징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잘린 머리를 보고 있는데도 잔혹함보다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먼저 다가옵니다.
《사탄의 보물》과 나란히 생각하면 더 흥미롭습니다. 하나는 인간을 아래로 끌어당기는 욕망을, 다른 하나는 육체를 넘어 살아남는 정신과 예술을 바라봅니다. 델빌에게 그림은 현실을 복사하는 창문이 아니라 생각을 눈앞에 보이게 만드는 무대였습니다.
《이상의 배》, 목적지는 지도에 없는 곳이다

델빌의 세계가 조금 무거웠다면 마지막에는 콘스탄트 몬탈드(Constant Montald)의 《이상의 배(The Boat of the Ideal)》에서 잠시 숨을 돌려보겠습니다. 제목부터 이 배의 목적지가 실제 지도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황금빛 나무와 짙은 푸른 풍경 사이에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실제 어느 장소를 충실하게 묘사했다기보다 거대한 무대 장치처럼 장식적입니다. 색도 자연의 색이라기보다 현실을 한 번 걸러낸 꿈의 색에 가깝습니다.
앞서 본 《사탄의 보물》과 비교하면 방향은 거의 반대입니다. 델빌의 인물들이 욕망에 붙잡혀 아래로 가라앉는다면 몬탈드의 인물들은 제목 그대로 현실보다 더 나은 어떤 세계를 향합니다.
이쯤 되면 19세기 말 벨기에 화가들이 무엇에 매료되었는지가 보입니다. 기억, 가면, 고독, 욕망, 죽음, 이상. 모두 눈앞에 물건처럼 놓을 수 없는 것들입니다. 화가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현실보다 더 낯선 세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5. 브뤼헐의 괴물에서 마그리트까지, 벨기에 미술은 현실을 얼마나 흔들었을까
여기까지 왔다면 처음 보았던 브뤼헐의 괴물을 다시 떠올려볼 만합니다.
브뤼헐은 현실에서 본 물고기와 곤충을 뒤섞어 세상에 없는 생물을 만들었고, 《베들레헴의 인구조사》에서는 성경의 베들레헴을 자신이 알던 플랑드르의 겨울 마을로 옮겨버렸습니다.
루벤스는 정지된 화면에 속도를 넣었고, 다비드는 실제 암살 사건에서 불필요한 것을 걷어내 마라를 한 시대의 강력한 이미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이 되자 화가들은 아예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갔습니다.
크노프는 기억을 재조립했고, 앙소르는 얼굴을 가면으로 바꾸었으며, 스필리아르트는 어둠과 고독을 그렸습니다. 델빌과 몬탈드에 이르면 현실의 무대 자체가 사라지고 사탄과 오르페우스, 이상향처럼 눈으로 볼 수 없는 생각이 그림 속 세계가 됩니다.
이 긴 흐름 끝에서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를 떠올리면 벨기에 초현실주의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사건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마그리트가 평범한 사물의 관계를 뒤집어 현실을 낯설게 만들기 훨씬 전부터 벨기에 화가들은 “우리가 보는 것이 정말 전부일까?”라는 질문을 여러 방식으로 던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미술관에서 작품을 많이 봤는지 세어볼 필요는 없습니다. 브뤼헐의 괴물 하나가 기억나고, 루벤스의 그림에서 눈이 바쁘게 움직였으며, 앙소르의 가면 앞에서 조금 불편했고, 델빌의 푸른 세계가 아름다운지 섬뜩한지 잠시 고민했다면 이미 중요한 장면들은 만난 것입니다.
미술관을 나선 뒤에도 머릿속에 자꾸 돌아오는 작품이 하나 있다면 더 좋습니다. 좋은 그림은 전시실에 얌전히 남아 있기보다 관람객을 따라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벨기에 왕립미술관 관람과 예매는 어떻게 할까?
벨기에 왕립미술관은 하나의 미술관 이름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여러 미술관으로 이루어진 복합 기관입니다. 브뤼헐과 루벤스, 다비드 등 고전 회화를 중심으로 보고 싶다면 Old Masters Museum을 먼저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마그리트까지 함께 보고 싶다면 Old Masters Museum과 Magritte Museum을 함께 관람할 수 있는 티켓을 확인해보세요. 같은 왕립미술관에 속해 있어 하루에 두 컬렉션을 이어 보는 일정도 가능합니다.
관람시간과 티켓 종류, 작품의 전시 여부는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특히 소장품이라고 해서 언제나 전시장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니므로 방문 직전 공식 홈페이지에서 운영시간과 현재 전시 정보를 확인하고 온라인으로 예매하는 방법이 가장 안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