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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붉은광장에 서면 시선은 자연스럽게 성 바실리 대성당과 크렘린으로 향합니다. 하지만 광장의 북쪽으로 눈을 돌리면 붉은 벽돌과 뾰족한 탑을 가진 또 하나의 거대한 건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러시아 국립 역사 박물관(State Historical Museum)입니다.
이곳에서는 러시아의 역사를 연도와 왕조의 이름부터 외울 필요가 없습니다. 돌을 깨뜨려 만든 도구, 매머드 상아에 새긴 작은 사람과 새, 수천 년 동안 땅속에 잠들어 있던 의례용 무기, 초원을 달리던 말의 화려한 장식까지 오래된 물건들이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흥미로운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유물의 재료와 표정도 함께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거친 돌에서 시작한 전시는 뼈와 상아를 지나 토기와 나무로 이어지고, 어느 순간 청동과 은, 금이 반짝이기 시작합니다. 러시아라는 나라가 존재하기 훨씬 이전, 이 거대한 땅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부터 천천히 따라가 보겠습니다.
1. 붉은광장에 들어선 거대한 역사책, 러시아 국립 역사 박물관

중세 러시아의 궁전처럼 보이지만 현재의 박물관 건물은 19세기에 세워졌습니다. 러시아의 역사를 한곳에 모아 보여주려는 목적에 맞춰 건축에서도 옛 러시아 건축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끌어왔습니다. 그래서 붉은광장의 오래된 건축물 사이에 서 있어도 좀처럼 낯설어 보이지 않습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건물 자체가 첫 번째 전시물처럼 느껴집니다. 화려한 천장과 벽화, 아치와 장식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앞으로 만나게 될 시대에 맞춰 분위기를 바꿉니다. 전시실을 옮겨 다니는 일이 곧 시대를 건너가는 장치가 된 것입니다.
규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고고학 컬렉션만 약 150만 점에 이르며 석기시대부터 중세까지 이어집니다. 주거지와 무덤에서 나온 유물뿐 아니라 고대 도시와 요새, 성소와 교역 거점에서 발견된 자료까지 모여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 박물관이 오래된 물건을 받아 보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설립 초기부터 고고학 조사와 발굴이 중요한 활동이었고, 박물관 연구자들이 직접 조사한 유적의 유물도 컬렉션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진열장 안의 물건과 그것을 찾아낸 고고학의 역사가 함께 쌓여 있는 공간입니다.
전시실 번호를 따라가면 시간이 흐른다
관람 동선은 의외로 친절합니다. 첫 번째 전시실의 구·중기 구석기에서 출발해 후기 구석기, 중석기와 신석기, 청동기, 스키타이 시대로 이동합니다. 이후 동유럽과 고대 세계, 민족대이동, 고대 루스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처음부터 왕관이나 황금잔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좋습니다. 출발점에는 돌이 있습니다. 사람이 집어 들고, 깨뜨리고, 다시 다듬었던 돌입니다. 거대한 역사를 만나러 왔는데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이 손바닥만 한 석기라는 사실이 이 박물관의 관람법을 잘 보여줍니다.
2. 러시아 땅의 첫 사람들, 석기와 뼈에 남은 선사시대

화려한 유물에 익숙한 눈이라면 첫 전시실의 석기가 조금 수수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크기나 장식보다 시간이 먼저 말을 걸어옵니다.
돌 하나를 집어 들고 원하는 방향으로 깨뜨려 날을 만들었습니다. 우연히 부서진 돌과 사람이 목적을 가지고 만든 도구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돌을 고를 것인지, 어디를 때릴 것인지, 어떤 모양을 남길 것인지 판단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돌을 깨던 손이 상아에 얼굴을 새기기까지

① 구·중기 구석기 석기에서 가장 먼저 보아야 할 것은 모양보다 제작법입니다. 초기 인류는 돌의 깨지는 성질을 이해하고 석핵에서 박편을 떼어내거나 양면을 다듬어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지역에서 구할 수 있는 돌의 성질에 따라 가공법도 달라졌습니다.

② 후기 구석기의 석제 도구로 넘어가면 종류가 더욱 다양해집니다. 길고 얇은 돌날과 첨두기, 긁개처럼 사용 목적에 맞춘 형태가 뚜렷해지고, 뼈와 매머드 상아로 만든 바늘과 송곳, 사냥도구도 많아집니다. 무엇을 만들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거기에 맞는 도구를 제작하는 기술이 한층 정교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후기 구석기 전시의 진짜 반전은 따로 있습니다. 먹고 살아남기 위한 도구 사이에서 갑자기 작은 사람의 얼굴이 나타납니다.

③ 말타 유적의 매머드 상아 여성상은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지역의 후기 구석기 유적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매머드 상아를 깎아 만든 작은 조각이지만 얼굴의 이목구비까지 표현되어 있습니다.
유럽의 구석기 여성상 가운데는 가슴이나 복부, 엉덩이를 크게 강조한 사례가 잘 알려져 있지만 말타의 여성상들은 조금 다릅니다. 가늘고 긴 몸을 가진 유형도 있고 얼굴을 비교적 세밀하게 표현한 것도 있습니다. 같은 후기 구석기 미술이라도 지역에 따라 사람을 바라보고 형상화하는 방식이 달랐던 것입니다.
이 작은 조각의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습니다. 부적이나 수호물, 다산과 관련된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답을 모른다는 사실이 유물을 더 오래 바라보게 합니다. 누군가 단단한 상아를 오랫동안 깎고 다듬어 굳이 사람의 모습을 남겼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타 유적에서는 ④ 매머드 상아로 만든 새 모양 조각도 발견되었습니다. 몇 번의 곡선만으로 몸과 목을 잡아낸 모습은 놀라울 만큼 간결합니다. 실제 동물을 오래 관찰하지 않았다면 나오기 어려운 표현입니다.
여기서 선사시대 사람들을 하루 종일 사냥만 하던 존재로 상상했던 시선이 조금 흔들립니다. 먹을 것을 구하는 일만으로도 힘겨웠을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 사람과 동물을 조각했습니다. 생존이 인간 생활의 전부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⑤ 매머드 상아 바늘과 장식용 핀에서는 생활이 훨씬 가까이 다가옵니다. 말타에서 발견된 상아 바늘은 모피나 가죽을 이어 옷과 주머니,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사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직물이 아직 일반화되지 않았으니, 혹독한 시베리아의 추위를 견디려면 가죽과 모피를 제대로 재단하고 꿰매는 기술이 중요했습니다.
그 옆의 핀에는 나선형 무늬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실용적인 도구를 만드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작은 물건에도 장식을 더했습니다. 추위를 막는 데 무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꾸몄습니다. 수만 년이 지나도 장신구에 마음이 가는 이유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물가에 정착하자 생활도구가 달라졌다

중석기와 신석기로 넘어가면 전시실에서 눈에 띄는 물건이 달라집니다. ⑥ 통나무배와 뼈·나무로 만든 사냥·어로 도구입니다. 작살과 낚싯바늘, 그물에 사용한 부표와 노까지 남아 있어 물가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의 생활을 제법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습니다.
특히 나무는 쉽게 썩기 때문에 수천 년 전 목제품이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귀중합니다. 박물관에는 당시 사람들이 얕은 호수와 습지를 오갈 때 사용했던 나무 노도 전해집니다. 물은 장애물이 아니라 이동로이자 식량 창고였습니다.

작살은 물속의 먹잇감을 찌르고, 작은 골제 낚싯바늘에는 줄을 묶었습니다. 그물을 띄우기 위한 부표까지 등장합니다. 하나씩 따로 보면 소박한 도구지만 한자리에 놓으면 물고기를 잡기 위해 필요한 기술 체계가 이미 꽤 복잡했다는 사실이 보입니다.

⑦ 신석기 토기 앞에서는 또 다른 변화가 보입니다. 흙으로 만든 그릇은 음식을 담고 조리하고 저장하는 생활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토기 표면에 반복해서 찍거나 긋고 누른 무늬를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그릇은 생활용품이면서 동시에 만든 사람의 손버릇과 미적 감각이 남은 물건이기 때문입니다.

석기시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⑧ 볼로소보 보물(Volosovo Hoard)이 시선을 붙잡습니다. 기원전 4천년기 말~3천년기 초 무렵의 것으로, 부싯돌 단검과 화살촉·투창촉, 끌과 자귀, 긁개와 칼 등 무려 118점의 석기가 모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발견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박물관에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고고학자 알렉세이 우바로프의 부인이자 고고학 활동에 깊이 관여했던 프라스코비야 우바로바 백작부인이 발굴 현장을 방문했다가 우산 끝으로 트렌치 벽을 건드렸고, 그곳에서 대량의 부싯돌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누군가 필요할 때 쓰려고 도구를 한꺼번에 숨겨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해석이 달라졌습니다. 유물 사이에 붉은 황토가 뿌려져 있었고 주변에 장례 흔적이 있었던 점을 근거로, 죽은 이를 위한 의례적 봉헌물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죽은 사람이 저세상에서도 사냥하고 생활하려면 도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돌로 만든 칼과 화살촉이 갑자기 단순한 생활도구가 아니라 사람들의 죽음과 믿음을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제 전시실의 색이 달라집니다. 돌과 뼈가 주인공이던 시대를 지나 불 속에서 녹이고 주조한 금속이 등장합니다.
3. 초원을 달린 사람들, 스키타이와 고대 유목 세계의 흔적
스키타이를 만나기 전에 먼저 청동기시대를 지나야 합니다. 제4전시실에 들어서면 도구의 재료가 바뀌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집니다. 구리와 주석을 다루고 금속을 주조하는 기술은 더 단단하고 복잡한 형태의 무기를 가능하게 했고, 귀한 금속과 정교한 무기는 권력과 신분을 표현하는 물건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보로디노 보물, 권력을 위해 만든 무기
그 변화를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 ⑨ 보로디노 보물(Borodino Hoard)입니다. 이름 때문에 1812년 나폴레옹 전쟁의 보로디노 전투를 떠올리기 쉽지만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1912년 당시 베사라비아의 보로디노 마을에서 돌을 채취하던 중 발견된 청동기시대 보물입니다.

보물에는 ⑩ 은제 창끝, ⑪ 금 장식판을 덧댄 은제 단검, ⑫ 정교하게 연마한 석제 도끼, ⑬ 금제 핀과 석제 곤봉 머리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보물이지만 금제품만 잔뜩 묻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 지역의 귀한 재료와 최고 수준의 제작기술을 한곳에 모아놓았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은제 무기에는 금 장식이 더해졌고, 석제 도끼는 기능만 생각했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매끈하고 정교합니다. 박물관은 이 유물들을 실용적인 무기이면서 동시에 의장용 무기이자 권력의 상징으로 설명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물건들의 연결 범위입니다. 일부 창끝은 북유라시아의 세이마-투르비노 계통 무기와 비교되고, 단검과 금제 핀에서는 에게해 청동기 문화와 비교되는 요소가 보이며, 아름답게 연마한 석제 도끼는 멀리 트로이의 사례와도 비교됩니다.
오늘날 지도에서 보면 서로 까마득하게 떨어진 곳들입니다. 그런데 기원전 2천년기 초의 작은 보물 꾸러미 안에서 그 흔적들이 만납니다. 청동기시대의 유라시아가 생각보다 훨씬 넓은 교류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멋진 증거입니다.
갈리치 보물, 고대 샤먼의 도구 상자를 열다

보로디노 보물이 권력자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면 ⑭ 갈리치 보물(Galich Hoard)은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사람을 닮은 우상과 동물상, 가면, 기묘한 단검이 등장하면서 전시장이 갑자기 의례의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박물관은 이 독특한 유물군을 고대 샤먼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는 일종의 의례용 도구 집합으로 해석합니다. 사람과 동물의 형상은 의례를 돕는 존재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확한 주문도, 의식의 순서도 알 수 없지만 어떤 물건들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한데 모였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특히 뱀 머리 형태의 손잡이를 가진 단검이 흥미롭습니다. 박물관은 뱀이 고대의 종교적 상징에서 지하세계와 연결되는 존재였을 가능성을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단검은 단순히 사람을 찌르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의례와 권력을 함께 상징했던 물건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갈리치 보물은 오늘날 한 박물관에 모두 모여 있지 않습니다. 발견된 유물군은 역사적인 과정을 거치며 나뉘었고, 현재 러시아 국립 역사 박물관과 에르미타주, 갈리치 지역 박물관 등에 분산되어 있습니다. 이곳에는 그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여섯 점이 남아 있습니다.
돌을 다루던 사람들의 세계에서 어느새 금속으로 신과 영혼의 모습을 표현하는 세계까지 왔습니다. 이제 시대는 청동기에서 초기 철기시대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제5전시실에서 말과 함께 유라시아 초원을 누볐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말 위에서 완성된 스키타이의 세계
기원전 1천년기 전반, 유라시아의 초원과 산악지대에는 무기와 말갖춤, 동물문양 미술에서 서로 닮은 특징을 공유하는 문화들이 넓게 퍼져 있었습니다. 박물관은 이를 스키타이-시베리아 세계라는 큰 흐름 속에서 보여줍니다.
여기서부터는 말을 빼놓고 이야기를 이어가기 어렵습니다. 말은 이동수단이자 전쟁의 동반자였고, 권력과 신분을 보여주는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배자의 장례에서는 사람만큼이나 말도 화려하게 꾸며졌습니다.

⑮ 스키타이 왕릉 코졸(Kozel)의 말 장식과 복원 마구는 그 세계를 한눈에 보여줍니다. 북흑해 지역의 이 왕릉은 1865년 러시아 국립 역사 박물관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반 자벨린이 조사했습니다.
발굴에서는 무려 11마리의 말이 묻힌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말의 머리와 목, 안장 주변에는 철·청동·은·금으로 만든 굴레 부속과 장식판, 방울과 초승달 모양 장식이 달려 있었습니다. 말 두 마리를 돌보던 것으로 해석되는 마부의 무덤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말 한 마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도 큰 비용이 들었을 텐데 여러 마리를 함께 묻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사회적 위치가 얼마나 높았는지 굳이 이름을 적어놓지 않아도 장례의 규모가 대신 말해줍니다.

⑯ 동물문양 금속 장식에서는 스키타이 미술의 또 다른 매력이 드러납니다. 사슴과 맹수, 새와 그리핀 같은 동물이 몸을 웅크리거나 서로 맞물리고 때로는 공격하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이른바 동물양식 또는 동물문양 미술은 단순히 동물을 예쁘게 새긴 장식이 아니었습니다. 무기와 말갖춤, 의복과 장례용품에 반복해서 등장했고, 생명과 죽음, 힘과 보호에 관한 관념과 연결된 것으로 해석됩니다. 작은 금속 장식 하나에 유목민의 세계관이 압축되어 있는 것입니다.

⑰ 전사의 단검과 무기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짧은 검과 단검, 활과 화살은 기동력이 중요한 초원 전투에 잘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손잡이와 칼집, 무기의 부속까지 동물 형상으로 꾸민 사례가 적지 않습니다.
무기는 싸우기 위한 물건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는 물건이었습니다. 현대의 제복이나 훈장처럼, 고대의 전사에게는 허리에 찬 무기와 말의 장식이 신분을 말해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초원은 하나의 문화만 지나간 길이 아니었다
스키타이 전시를 보고 있으면 유라시아 초원이 하나의 거대한 길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북흑해에서는 그리스 도시들과 스키타이 세계가 만났고, 동쪽으로 가면 사카와 남시베리아의 여러 문화가 이어집니다. 무기와 말, 귀금속과 장식기법이 사람과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몇 세기 더 흐른 뒤 남시베리아에서는 아주 다른 모습의 유물이 등장합니다.

⑱ 타슈티크 문화의 장례용 데스마스크입니다. 남시베리아 하카시야 지역에서 발견된 가면들을 마주하면 앞서 보았던 무기와 말 장식의 화려함과는 전혀 다른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가면에는 얼굴의 윤곽과 눈·코·입이 표현되어 있고 일부에는 붉은색과 검은색 채색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죽은 사람과 관련된 장례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이해되지만, 모든 가면이 똑같지 않습니다. 얼굴의 폭도 다르고 눈과 입의 표현도 조금씩 달라 하나씩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이것들이 익명의 고고학 자료가 아니라 실제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 얼굴처럼 다가옵니다.
돌도끼에서 시작한 관람은 어느새 죽은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는 데까지 왔습니다. 그 사이 사람들은 돌을 다듬고, 상아를 조각하고, 배를 만들고, 금속을 녹였으며, 말과 함께 대륙을 이동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전시의 무대는 조금씩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의 세계로 이동합니다. 다음에 등장하는 것은 이름 없는 선사시대 문화만이 아닙니다. 슬라브와 바랑기아인, 교역도시와 전사, 동전과 문자처럼 기록 속에서도 이름을 찾을 수 있는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4. 슬라브에서 루스까지, 도시와 나라가 만들어지다
시간이 중세로 접어들면 전시실의 물건들이 갑자기 친숙해집니다. 칼과 열쇠, 동전과 목걸이, 그릇과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선사시대 사람들의 흔적을 지나 이제 기록 속에서도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이 시기의 동유럽을 곧바로 하나의 러시아 문화로 묶어서는 곤란합니다. 슬라브계 주민과 핀우그리아계 집단, 스칸디나비아에서 이동해 온 사람들, 볼가 불가르와 초원의 여러 집단이 강을 따라 만나고 헤어졌습니다. 초기 루스는 이런 복잡한 접촉과 교역 속에서 모습을 갖춰갔습니다.
그네즈도보, 강이 고속도로였던 시대의 국제도시

이 복잡한 세계를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장소가 스몰렌스크 인근의 ⑲ 그네즈도보(Gnezdovo) 유적입니다. 9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번성한 대규모 유적으로, 정착지와 수많은 봉분묘가 함께 남아 있습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왜 이곳이 중요했는지 금세 이해됩니다. 드네프르강 수계에 자리한 그네즈도보는 발트해 방면과 흑해·비잔티움 세계를 연결하는 교통망의 요지였습니다. 오늘날 고속도로와 철도가 하는 역할을 당시에는 강과 배가 담당했습니다.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과 남쪽에서 올라온 상인이 이곳에서 만났고, 은화와 유리구슬, 무기와 장신구, 각종 상품이 함께 움직였습니다. 발굴에서는 슬라브와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함께 발견됩니다. 그네즈도보는 초기 루스가 처음부터 여러 문화가 만나는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눈으로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그 가운데 ⑳ 그네즈도보의 화폐·장신구 보물은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10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보물에는 은과 구리합금 장신구, 유리와 홍옥·수정으로 만든 구슬, 화폐 등이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 물건들을 감상하기 좋게 차곡차곡 보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발굴 당시 유물은 매우 촘촘하게 뭉쳐 있었고 주변에서는 자작나무 껍질과 가죽 조각도 발견되었습니다. 원래 자작나무 껍질로 감싸 가죽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보물이 무덤이나 성소가 아니라 집이 있던 공간 안에 숨겨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녹여 다시 쓰기 위한 금속 조각도 아니었습니다. 완성된 장신구와 돈이었습니다.
누군가 위험을 느끼고 자신의 재산을 급히 묻어두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쟁이나 습격이 지나가면 다시 돌아와 꺼낼 생각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인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천 년 가까이 지난 뒤 고고학자들이 대신 그 꾸러미를 열었습니다.
박물관에서 보물이라는 말을 들으면 왕의 금고부터 떠올리기 쉽지만, 고고학에서 보물은 때때로 이렇게 한 사람의 다급했던 순간을 보존합니다.
체르나야 모길라, 10세기 전사의 장례가 남긴 것
그네즈도보에서 강을 따라 움직이던 상인과 전사의 세계를 보았다면, 이번에는 그 사회의 상층부가 죽음을 어떻게 준비했는지 살펴볼 차례입니다.

체르니히우의 ㉑ 체르나야 모길라(Black Grave)는 고대 루스의 가장 유명한 10세기 봉분묘 가운데 하나입니다. 1872~1873년 고고학자 드미트리 사모크바소프가 발굴했으며, 화장된 성인 남성과 젊은 남성, 여성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
성인 전사 곁에는 두 자루의 검과 사브르, 창, 화살촉, 투구와 쇠사슬 갑옷 조각, 방패, 안장과 등자가 놓여 있었습니다. 말 두 마리의 흔적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죽은 이를 보내면서 살아 있을 때의 무장과 신분을 무덤 안에 다시 구성한 듯한 모습입니다.
무기만 본다면 전사의 무덤이라고 생각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옆으로 가면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㉒ 체르나야 모길라의 두 리톤(rhyton)입니다. 야생 소의 뿔에 은제 장식을 덧댄 10세기 음용구로, 큰 것은 길이가 약 34cm에 이릅니다.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더 재미있습니다. 은제 장식에는 식물무늬뿐 아니라 사람과 새, 맹수와 환상적인 존재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특히 큰 리톤의 장식은 고대 루스 공예의 대표작으로 꼽힐 만큼 정교합니다.
리톤은 단순한 술잔으로만 보기 어렵습니다. 봉분을 쌓는 과정에서 장례 의례와 잔치가 이루어졌고, 이런 음용구도 그 의례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칼과 갑옷, 말과 술잔이 한 무덤에서 함께 발견된 이유를 생각해보면 당시 전사 귀족의 삶에서 전쟁과 잔치, 죽음과 의례가 얼마나 긴밀하게 이어져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고학이 흥미로운 이유가 이런 순간에 있습니다. 거대한 왕조의 역사 뒤에서 한 사람이 무엇을 차고, 무엇을 타고, 무엇으로 술을 마셨는지가 불쑥 모습을 드러냅니다.
왕자의 얼굴이 동전에 등장하다
10세기 말이 되면 초기 루스의 역사를 보여주는 물건에도 큰 변화가 나타납니다. 블라디미르 대공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비잔티움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통치자의 권위를 표현하는 방식에도 새로운 언어가 등장합니다.

㉓ 블라디미르 대공의 즐라트니크(zlatnik)와 스레브레니크(srebrenik)가 대표적입니다. 금화와 은화에는 통치자의 모습과 그리스도, 류리크 왕조를 나타내는 표지가 등장합니다.
국립 역사 박물관이 소장한 블라디미르의 즐라트니크 가운데 한 점은 지름이 약 2.2cm, 무게가 4.15g에 불과합니다. 작은 금화지만 앞면에는 왕좌에 앉은 블라디미르가 십자가를 들고 있고, 뒷면에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동전은 물건을 사고파는 수단이면서 아주 작은 이동식 선전물이기도 합니다. 손에서 손으로 이동할 때마다 누가 통치자인지, 그 통치자가 어떤 종교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는지를 함께 전달합니다. 국가의 권위가 이제 검과 봉분만이 아니라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금속 위에도 새겨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왕자의 금화보다 오래 보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글씨
그런데 왕자의 얼굴이 새겨진 금화보다 오히려 중세 사람들이 훨씬 가까이 느껴지는 유물이 있습니다.

㉔ 노브고로드의 자작나무 껍질 문서입니다. 종이가 귀했던 중세 루스에서 사람들은 자작나무의 안쪽 껍질을 펼치고 뾰족한 도구로 글자를 긁어 적었습니다.
내용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거래와 빚, 부탁과 개인적인 편지가 있고 글씨와 숫자를 연습한 흔적도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376호 문서에는 13세기 말~14세기 초 누군가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용기의 바닥에 숫자를 적어놓았습니다.
이런 유물이 중요한 이유는 왕이나 성직자가 아닌 평범한 도시인의 목소리를 들려주기 때문입니다. 연대기는 어느 왕이 전쟁에서 이겼는지를 기록하지만 자작나무 문서는 누가 누구에게 돈을 받아야 했는지, 무엇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는지, 누가 글씨를 연습했는지를 남깁니다.
노브고로드에서는 어린아이의 글씨 연습과 낙서까지 발견되었습니다. 여섯아홉 살쯤으로 추정되는 온핌이라는 소년은 글자를 연습하다가 말을 탄 전사가 적을 찌르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수업하다 공책 귀퉁이에 그림을 그리는 아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천 년 가까운 시간이 갑자기 사라지는 순간입니다. 중세 도시의 사람들도 계산했고, 돈을 빌렸고, 편지를 보냈고, 아이들은 글씨 공부를 하다가 딴짓을 했습니다. 오래된 유물이 현재의 우리와 연결되는 순간은 의외로 이런 사소한 기록에서 찾아옵니다.
5. 모스크바가 중심이 되다, 중세 루스에서 차르의 시대로
평범한 사람들의 글씨까지 남아 있던 도시의 세계는 13세기에 커다란 충격을 맞습니다. 몽골의 서방 원정으로 여러 루스 공국과 도시가 공격받았고 동유럽의 정치 질서도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를 단순히 ‘몽골이 지배하고 러시아가 견뎠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루스의 여러 공국은 킵차크 칸국, 흔히 금장한국 또는 골든 호드라고 부르는 정치세력과 조공·승인·외교·교역으로 얽혔습니다. 그 복잡한 관계를 아주 작은 물건 하나가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작은 은판 하나에 칸의 명령을 담다

㉕ 우즈베크 칸(Öz Beg Khan)의 파이자(paiza)입니다. 14세기 전반 금장한국에서 만들어진 은제 신표로, 주조와 단조를 거쳐 글자를 새기고 일부에는 금도금을 더했습니다.
파이자는 칸에게 특별한 권한을 받은 관리나 사절이 자신의 지위를 증명할 때 사용한 일종의 통행·권한 증표였습니다. 현대의 여권이나 신분증과 완전히 같은 물건은 아니지만, 이것을 지닌 사람이 개인의 이름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칸의 권위를 등에 업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유물에는 아랍 문자로 우즈베크 칸의 명령이 새겨져 있습니다. 내용은 복종을 요구하는 매우 강한 문구입니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은판에 거대한 국가 권력의 목소리가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파이자를 보고 있으면 고고학 유물의 크기와 역사적 중요성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느끼게 됩니다. 거대한 검보다 작은 금속판 하나가 훨씬 넓은 영토에서 사람과 말을 움직이고 명령을 통과시키는 힘을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여러 공국 가운데 모스크바가 올라오다
몽골 침입 이후에도 루스의 여러 공국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정치질서 안에서 서로 경쟁했고, 그 과정에서 작은 공국이었던 모스크바가 점차 영향력을 키웠습니다.
14~15세기를 지나면서 모스크바 대공국은 주변 지역을 흡수하고 정치적 중심으로 성장합니다. 박물관의 전시물도 이 변화를 따라 달라집니다. 전쟁을 보여주는 무기와 갑옷만이 아니라 인장과 화폐, 종교 유물, 생활용품과 수공업 제품이 함께 늘어나면서 국가와 도시의 모습이 훨씬 복잡해집니다.
장신구를 살펴보는 재미도 있습니다. 오래된 유물이라고 해서 디자인까지 언제나 낯설지는 않습니다. 귀걸이와 펜던트, 팔찌와 버클 가운데에는 형태만 떼어놓고 보면 지금 사용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세련된 물건들이 있습니다.
사람은 오래전부터 자신을 꾸몄고 좋은 물건을 갖고 싶어 했습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더 화려하게 보여주려 했고, 장인은 같은 재료라도 조금 더 아름다운 형태를 만들기 위해 손을 움직였습니다. 시대는 멀어도 물건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까지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닙니다.
돌 하나에서 시작한 여행의 끝
이제 처음 들어왔던 구석기 전시실을 잠시 떠올려보겠습니다.
돌을 깨뜨려 날을 만들던 손은 매머드 상아에 사람과 새를 새겼습니다. 나무를 파내 배를 만들고, 흙으로 그릇을 빚고, 금속을 녹여 무기와 장신구를 만들었습니다. 초원의 말에는 화려한 장식을 달았고, 전사의 무덤에는 검과 투구, 술잔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자 왕의 얼굴이 동전에 새겨졌고 평범한 사람은 자작나무 껍질에 편지를 남겼으며, 칸의 명령은 은제 파이자 위에 새겨졌습니다.
러시아 국립 역사 박물관의 매력은 바로 이 긴 연결에 있습니다. 역사를 왕과 전쟁의 목록으로 보여주는 대신 사람들이 실제로 만들고 사용하고 잃어버리고, 때로는 죽은 사람과 함께 묻었던 물건을 차례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전시실을 다 걷고 나면 연도보다 물건의 모습이 먼저 기억에 남습니다.
그런데 아직 아주 화려한 이야기가 하나 남아 있습니다.
이 박물관에는 고고학 전시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른 공간, 황금 보물실이 있습니다. 고대의 귀금속부터 왕실과 귀족이 사용했던 금·은 세공품, 보석과 의례용 물건까지 인간이 가장 귀하게 여겼던 재료들이 한곳에 모여 있습니다.
구석기의 돌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걸어온 뒤 황금을 바라보면 반짝임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인간은 언제부터 금을 특별하게 여겼을까요. 왜 금은 장신구가 되고, 신에게 바치는 물건이 되고, 권력자의 손에 들어가 왕권을 상징하게 되었을까요.
그 질문의 답은 또 다른 진열장 안에서 시작됩니다.